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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너테제 동방,코레아 통. 담론 2 (선경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공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237회 작성일 15-02-02 09:25

본문

              6.15공동선언 유럽위원회 14주년행사  (한겨레신문유럽 지국장 선경석)

"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된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여정."

-1969.10.21.  근소한 3표 차 로 수상에 선출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합니다.  “비록 독일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두 국가는 서로에게 다른 국가가 아닙니다.
  두 나라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만 접근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동독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하면서 바로 정상 협상을 제안합니다.
                                                   
  또 1970. 1월에 독일 땅에는 두 국가와 두 체제가 존재하고 있다. “동방정책”은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외교정책, 즉 동독을 국가로 인정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 때까지(1969년)서독이 견지하고 있었던 정책을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즉 1955년 외교 정책 할슈타인 원칙, 이 원칙은 서독 발테어 할슈타인 외무부장관이 표명한,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정책입니다.
    1949년 동.서독이 분리되는 이 때 분단을 과도기로 생각했으며 흡수 통일이 서독의 정책이었습니다.(Walter Hallstein.1901-1982.마인츠 출.법학자.정치가. )   

(많은 사람들은 동독이 탈 동독인들을 막기위해 장벽을 세웠다고  잘 못 배운 우익 학자들이 쓰고, 위정자들이 말하면서  알고 있지만 , 아덴아워와 할슈타인의 흡수통일 서독 외교 정책이 베를린 장벽을 세우게된 결정적 배경이었다.)   

--프리들리히 에베트 재단 크리스트 폴만 소장은 2014년 KBS와 인텨뷰에서 이 때 서독은 빌리 브란트가 수상 되기 전에 서독은 독일의 유일한 대표 정부라는 권한을 포기 하려 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동독을 인정한 국가(소련 제외)들도 비 우호적 국가로 제한적 정책을 펼쳤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제2차 대전 후 소련이 점령한 독일 영토에 세워진 공산주의 공화국을 인정 했다. 라고 했습니다.

  -1970년 3월 19일 동독 에어푸르크에서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와 처음 1차 동.서독 정상회의에 참석하므로 동방정책을 최초로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정상회담에서 빌리 브란트 수상은 “우리는 각각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대외적으로 누가 누구를 대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고  합니다.

(그의 동방정책은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계급에서 출발 1933년 20세나이로 히틀레 독재에 저항을 위해 노르웨이로 망명. 1945년 귀국 베를린에서 정치 활동 시작.)

    -1961년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고 당시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시장으로서 그 광경을 지켜 봅니다.    그 때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통일이 당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 동방정책에 비판도 많았는데 “예" 괴뢰 집단인데 국가로 인정해 주는 것 아닌가?. 또 1950년대부터 동방정책이 수립되기 전까지 독일의 당면 과제로 통일을 꼽는 사람이 20%가 안됐습니다. 빌리 브란트는 이 현실을 받아 드립니다.)

    -1970년 5월 21일 서독 캍셀에서  제 2차 동.서독 정상 회담에서 빌리 브란트 수상은 20개의 항목을 제안하고 두 개의 독일 국가 간 관계를 정리하고 접촉을 개선하기 위한 조약을 체결 합니다.

  이 조약은 독일인이 두 나라에 나누어져 살고 있지만  여전히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조약에 의하여 서베를린 시민은 통행증을 받을 수 있고 이 통행증을 가지고 동베를린을 방문할 수 있었다. 브란트 수상은 두 국가 시민들 사이에 접촉을 늘리며 긴장을 완화 시키고자 했습니다.  흡수 통일 대신 양국 시민간 접근을 통해 변화 시키고자 했으며 기본 조약 체결 후 인적,물적 교류가 크게 늘어 났고, 1976년 우편.통신 협정이 체결된다. 1979년 한 해 서독인 360만명이 동독을 방문하고,동독인이 140만명이 서독을 방문한다. 전화통화는 1972년 70만회에서 10년만에 2.300만회로 늘었다.)     
1-3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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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용혁님의 댓글

이용혁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 조약은 독일인이 두 나라에 나누어져 살고 있지만  여전히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추동했던 여러가지 동력들 중에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매우 큰 축을 담당했던 것이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독일 민족이라든지, 애국이라든지, 이런 개념들을 긍정적으로 거론하는 것 자체가 거의 금기시 되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통일을 추동하는 이데올로기적 동력이 될 수 있었나요? 궁금합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1)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적인 방향이 아니라 가족애를 거론하면서 "이산가족의 슬픔" 같은 얘길 꺼내는 전략을 사용했다면 그런 얘기들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고, (2) 혹은 저 진술이 사실이 아니고 실은 통일정책을 추진했던 다른 어떤 좀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은데,

잘 아시는 분들 계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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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st님의 댓글

Ang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Wir sind ein Volk"라는 플랫카드가 구 DDR의 1989년에 보여서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 같은데, 원래 그런것 거의 없었습니다. 독일이라는 민족국가의 구성은 19세기 후반에서나 이루어지고 Nationalsozialismus의 경험이 워낙 강렬해서 독일 연방공화국은 연방 공화국으로 분권화되고, DDR은 아예 정식 국호에서 Deutschland라는 말이 빠져버립니다. 즉, 탈 민족주의로 나아가게 됩니다. 1989년의 일련의 사태들은 상당한 우연들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국제정치적 상황이 상당히 유리했기 때문에 가능했었지만 이것이 독일인들의 동족애 혹은 민족애로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힘듭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용혁님의 말씀과 같이 오히려 실용적인 측면이 1989년의 사태들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모티브(BRD의 입장에서, DDR은 선택권이 거의 없었음.)가 되었다고 볼 수가 있고, 통일은 실제 정치인들의 냉정한 협상의 산물이지 독일 일반국민들의 통일염원이 현실화되었다고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통일 염원이 없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나 이러하나 염원이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 혹은 당위성 보다는 DDR의 경우는 서구의 물질문명을 더 누릴 수 있는 자유(Lada나 Trabant 말고 Mercedes나 BMW같은 고급 차를 탈 수 있는 자유, 멋진 Levis청바지를 입을 수 있는 자유, 큰 정원이 딸린 화려한 단독주택에서 살 수 있는 자유 등), 여행(DDR 국민은 서구권으로 여행이 어려웠었음. 동구권으로의 여행은 상당히 활성화. 심지어는 DDR 시민중에 북한에 여행갔다 온 시민들도 상당수 있음.)의 자유 정도이지 DDR시민들의 일상과 사생활에서의 자유가 북한과 같이(지금은 남한도 일상과 사생활의 자유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완전한 통제받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물론 나중에 안전보위부가 민간인 사찰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발칵 뒤집혀 졌지만 동시대 남한에서도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BRD의 경우는 기업들의 경우는 대부분 통일을 반겼지만(시장의 확대와 값싼 고급 노동력 흡수, DDR 산업의 신탁청을 통한 헐값 매수), 일반 국민들에게는 잠깐 동안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기뻐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연대세라는 새로운 세금에 불평을 늘어놓고 때마침 찾아온 장기불황의 그늘아래서 모두 Ossi놈들 때문이라는 편견만 키워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Brandt 수상은 출신도 행적도 상당히 의심스러운 인물이기는 한데 수상 재직시 발생한 Guillaume 사건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NVA의 장교이자 스파이였던 Guillaume은 무려 Brandt 수상 왼팔이었고 사생활이 매우 지저분한 Brandt 수상에게 고급 창녀 혹은 여배우들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Brandt 수상이 Guillaume이 스파이인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사생활이 탄로날것을 두려워해서 묵인했거나 혹은 둘다 DDR과 암막에서 협력하던 관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골수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던 Brandt이기에 DDR에 대한 접근이 단순히 동족애로서의 접근인지 혹은 이면에 숨겨진 이적행위였는지는 논의가 많이 필요할 겁니다.
 
  Adenauer, Erhard, Kiesinger 까지의 DDR에 대한 접근을 당시 DDR의 상황과 잘 대입시켜야 합니다. Ulbricht는 다른 단어가 필요없이 UdSSR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했고 DDR의 정체성은 UdSSR의 종속되고 배상금을 물어내야 하는 위성국에 불과했습니다. 즉, DDR을 독립적인 외교파트너로 인정하기에는 Ulbricht 정권은 외교적 자율성을 갖추지 못하고 국내적으로도 인권을 심각하게 탄압하는 소위 불량국가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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