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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아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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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품마렵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6건 조회 1,355회 작성일 15-08-18 00:44

본문

가아닌양님의 코멘트를 읽고 생각한 것들을 좀 써 보려 합니다. 널리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을 만한 주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자유투고 게시판에 게시할 수 있는 허용범위 안쪽일거라고 여겨봅니다. :) 딱 꼬집어 가아닌양님에게 드리는 말씀인 건 아니고 (가아닌양님도 그저 제가 쓴 내용과 관계해서 비판적으로 더 검토하고 생각해볼 수 있을만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신 것들을 코멘트로 달아두신 것 뿐인 것 같구요), 그냥 관련된 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가아닌양님의 댓글--------------
“초자아”라는 정신분석학의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고전적 모델을 따른다면, 초자아는 욕구를 좌절시키는 제 3항의 개입에 기인한다. “초자아”의 등장을 위해서는 욕구의 대상인 “어머니”와 그 욕구의 성취를 방해하는 “아버지가”가 모두 필요하다. “초자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데올로기 분석을 위해 “초자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다른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의 고전적 “효”를 이러한 “초자아” 모델을 통해 분석해낸다면, 우리는 이 모델 아래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이중적 모델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효”모델을 아버지에 대한 복종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관계에서의 일탈에 대한 가능성(그것에 대한 어머니의 이해 가능성)을 동반한다. 이 관계 안에서 자식은 아버지의 모델을 일탈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일탈(혹은 타자)이 항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최근의 부모자식간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인 “효” 개념의 작동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제 3항이 개입될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관계이다. 주체는 “타자(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기본 심리적 메커니즘은 제 3항(금지)의 개입 가능성 없이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초자아” 모델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만한 현대적 특징은 부모의 욕망과 자식의 욕망이 어긋날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머니(욕망에 대한 이해, 혹은 욕망해야 할 대상)와 아버지(금지)의 이중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욕망과 금지의 이중적 구조가 발생할 가능성이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금지의 상실’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교육모델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교육모델은 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을 이해한다. 그리고 기존의 윤리를 아이에게 명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는 이러한 자유주의 교육모델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점점 모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혹은 사회적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댓글 끝--------------



프로이트의 오리지널 초자아 모델에서,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 앞으로 이 멘트는 생략하겠습니다), 초자아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법이 주체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법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실제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리는 규범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습득하게 되는 외부 규범들의 대부분을 퉁쳐서 담을 수 있는 개념인데, 프로이트의 모델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런 규범을 내려주는 자를 아버지로 봅니다. 아마 그 당시 중산층 문화에서는 그런 가족 관계가 널리 퍼져 있었겠지요.

이 모델을 대략적으로 스케치 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있어서 일종의 유토피아 같은 것입니다. 엄격함이나 규범적임과는 대체로 거리가 있고, 아이를 향한 그저 따듯한 애정만을 보여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물론 현실 속에서 어머니도 아이를 꾸짖기도 하고 그럽니다만, 효과적인 모델링을 위해서 어머니를 그런 포지션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반면 이 모델 속의 아버지는 법을 말하는 존재, 엄격하고, 아이에게 규범적 강요를 하는 그런 이입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무한히 평안하기만 한 어머니의 품에서 떼어내 아이에게 따라야 할 규범을 제시하고, 그 규범들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세상(사회)에 아이를 밀어넣는 존재입니다. 웃어른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를 해라, 옷을 단정히 입어라, 기타등등... 이것을 아버지의 욕망이라 할 수 있겠지요.

80년대인지 90년대인지, 아니면 더 오래 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꽤 오래전에 쓰인 우리나라 동화 중에 이런 내용의 동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아이는 동네 친구들이 제기차기를 하는 걸 보고 자기도 같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제기가 없었습니다. 고심하던 아이는 아버지의 벽장 안에 많은 서류가 있다는 걸 기억해 내고는 서류 더미에서 종이를 몇 장 슬쩍해 제기를 만들었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중요한 서류가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집안을 뒤집어 엎습니다. 주인공 아이는 벌벌 떨며 범행을 자백하고, 아버지는 아이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팬 다음 뒷산의 나무에 묶어 놔 버립니다. 삵이나 오소리한테 먹히게 놔 두라고, 만약 누가 몰래 풀어준다면 풀어준 사람도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주인공은 한밤중의 산 속에서 공포에 질려 울고 있습니다. 그 때 누군가 살그머니 다가와 동앗줄을 풀어줍니다. 주인공의 누나입니다. 누나는 어쩌자고 아버지 서류를 빼다 제기를 만들었냐고 핀잔을 주면서, 아버지 화가 풀릴 때 까지 며칠 동안은 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고 아버지 화가 가라앉았다 싶으면 나아가 싹싹 빌라고 충고합니다.

이 동화 속에서 아버지는 모델 속 아버지와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고, 어머니 모델은 누나가 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 고전적 모델을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아이의 한 쪽에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있는 아버지, 다른 한 쪽에는 어서 이리 오라는 듯 웃으며 팔을 벌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는 아버지가 일종의 스트레스 요인, 어머니가 어떤 해방구나 안식처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모델링할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욕망을 중심으로 한 방식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향한, 또는 자식을 둘러싼 어떤 특별한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뭐랄까, '최고' 로 만들고자 하는 그런 종류의 욕망이 여기에 포함되고, 또한 자식을 향한 어떤 굉장히 모호한 욕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자식을 언제나 품고 있고 싶어하는 욕망 같은 것 말입니다. 흔히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성애라는 것과 뒤섞여 이런 어머니의 욕망은 제대로 관찰되기 어렵기도 하고, 또한 애초에 모호함을 그 본질적 특성으로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욕망이 비교적 분명하고 알기쉬운 형태 -구체적인 규율들- 로 드러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기존에 제가 썼던 글에서는 그 풍부하고 모호한 욕망 중에서 자기 자식을 '최고' 로 만들고자하는 그런 종류의 욕망만을 꼬집어 논했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다룰 수 있는 것은 대충 그정도 영역에 한정될 것 같습니다. 지금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그런 종류의 욕망으로 한정지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어머니의 욕망은 뭔가 '밀착적' 입니다. 아버지의 욕망이 아이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마치 옥좌에 앉아있는 왕과 그로부터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무릎을 꿇고 있는 왕자 사이의 관계 같다면, 어머니의 욕망은 왕자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아이구 여기 솔기가 터졌구나, 카라가 잘못 접혔네, 아유 여기 어깨에 먼지좀 봐, 아침은 잘 먹었니? 어디 불편한 데는 없구? 오늘 무도회에서 출 춤 연습은 잘 끝났겠지? 인삿말들도 많이 연습했니? 잘 하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된단다!" 같은 말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그런 풍경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정치화의 노선들" 에서 언급했던 어머니들의 경우에는 "수학 숙제는 다 했니? 영어 단어는 다 외웠어? 오늘 입은 바지는 이리 주고 여기 새로 다려 놓은 바지 내일 입고 가! 머리 꼴이 그게 뭐니, 이리와봐 엄마가 만져줄게! 그러고 다니면 남들이 우습게 알아! 자, 여기 용돈! 먹고싶은 거 있으면 사 먹고, 어디가서 기 죽지 말고! 학원 끝나면 친구들이랑 떠들고 있지 말고 바로 내려와! 독서실 태워다 줄테니까. 준비물 잊은 건 없어? 아들~ 엄마가 아들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지?" 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종류의 어머니의 욕망은 "Die Säulen der Erde" 라는 TV 시리즈에서 알기 쉬운 형태로 보여집니다. 한 귀족 여인과 그 아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아들은 젊은 청년이고, 장차 고위 기사나 혹은 왕위 까지도 기대해볼 수 있을만한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를 열망하고 있고, 또한 아들을 향한 어떤 기묘한 형태의 욕망도 보여줍니다. 자식사랑이라기 보다는 남자를 향한 사랑과 더 유사한 것 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욕망은 "(과도해질 경우) 주체를 질식케 하는 욕망" 이라는 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TV 시리즈에서 아들은 정말로 어머니의 과도한 접근 때문에 심리적으로 질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머니에게 화를 내거나 밀쳐내거나 하면서 거리를 확보해 보려 하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상처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괴로워하게 됩니다. 이 가족의 아버지는 매우 무능한 자로, 가정 내에서 이렇다할 권위를 갖고있지도 못하며 거의 '마누라에게 잡혀 살' 다 시피, 혹은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다시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교묘히 이용하기도 합니다. 예를들어 아이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 "아이고, 당신은 드러누워 테레비만 보지 말고 애도 좀 신경 쓰소! 자가 오늘 숙제좀 하라고 그랬더니 나한테 팍 성질을 내고 뛰 나가 삐맀다니까? 이런 때는 아비가 아 교육좀 시키야 되는 기 아뇨?" 라고 은근히 아버지에게 아이의 잘못을 일러바쳐 아버지가 아이를 혼내게 한다든가, "맹꽁이 오늘 학원 빼먹고 피씨방 갔었던거, 당신 알고 있어?" 같은 식으로 은근히 정보를 흘려 아버지를 움직임으로써 아이에게 압력을 가하려 한다든가.

이런 복잡한 '어머니의 욕망' 을 대면하는 자식에게 있어서, 이번에는 먼저 설명한 프로이트의 고전적 모델에서와는 반대로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 주체에게 있어 '숨쉴 틈' 을 마련해 주는 도주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전통적 가부장 문화에서와 같은 형태로 어머니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비교적 명료하게 어떻게 복종해야 할지가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는 아버지의 법에 철저히 따름으로써 아버지에게 충직한 자식으로 인정받고, 어머니의 무정형으로 쏟아지는 욕망들에 따르지 않을 구실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아버지가 학교에서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도 성실히 할 것을 명했고, 어머니는 반에서 일등이 될 것을 요구했을 때, 아버지의 명만 충실히 이행했다면 어머니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아버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에 겁먹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압도하는 강력한 권위자가 아니라는 모델링에 따를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반에서 일 등을 못하면 죽도록 채찍질을 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또 다르겠죠. 전통적 모델 속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욕망이 지나쳐서 아이를 힘들게 할 경우 개입해서 어머니의 폭주를 제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하여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비호받음으로써 주체는 쏟아지는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부터는 간단히 모델1, 모델2 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가아닌양님께서는 효를 기본적으로는 모델1 에서 아버지의 명령이 차지하는 위치에 놓을 수 있는 것으로 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현대사회에 있어서 더 인상적인 것은 모델 1의 형태를 띠는 전통적인 효 이데올로기보다는, 전통적인 초자아모델에서 가능했던 아버지적 규범과 그로부터의 일탈 및 안식처로 제시되는 어머니의 보살핌 사이에 존재하는 자녀(주체)라는 삼각형 모델이 사라져버린 상황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수긍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맥락과의 관련 속에서 이야기를 이어서 더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현대 한국에서, 특히 학벌과 스펙을 통한 고원 위로의 진입 가능성을 둘러싼 무한경쟁의 장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이 모델 2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효 이데올로기가 모델 1의 형태로만 가능한 게 아니라, 모델 2가 작동하는 상황에서도 보조 엔진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신사임당이나 맹자 엄마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요. 맹모의 경우 맹자를 공부시키는 데에 몰두한 이야기만 알려져 있지만, 신사임당의 경우 자식에게 매우 엄격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남편은 대조적으로 좀 무능했던 인간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런 구도에서도 어머니의 뜻에 따라 공부에 열심히 매진하는 것은 여전히 효행으로 쳐 졌고, 지금도 그렇게 쳐 지고 있습니다.

"정치화의 노선들" 에서 '초자아' 의 개념을 저는 오리지널인 모델 1 의 형태, 즉 아버지의 명령이라는 형태로만 이해해 사용하지 않았고, 좀더 제 멋대로 뜻을 넓혀서, 어머니의 욕망이 주체의 정신에 또아리를 튼 경우까지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종합해 효 이데올로기가 자유주의적 경쟁체제에서의 초자아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따른다면 효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영향력의 크기는 제가 했던 것보다 작게 평가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기각될 필요는 없게 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리모델링(?)해서 사용하는 초자아 개념에 대해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초자아라는 개념은 모델 1에서 아버지의 법이 주체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것으로 사용되어 왔지만, 저는 초자아가 주체의 정신 속에 자리잡은 타자의 욕망 일반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면 더 편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모델 1과 모델 2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모델 1과 모델 2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구도는, 주체에게 엄습하는 타자의 (과도한) 욕망과, 그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해 주는 안전장치 내지는 피난처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 모두가 주체의 정신 속에서 적절한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자리를 잡았을 경우, 주체는 욕망과 그 욕망으로부터의 적절한 안전거리 두 가지를 모두 획득하고 안정적인 심리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가아닌양님께서 말씀하신 바와도 같이, 여기에서 욕망만 남고 피난처는 사라진 불균형상태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가아닌양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비슷한 방향입니다.

모델 1과 모델 2 모두에서, 주체에게는 엄습하는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피난처 내지는 안전장치를 갖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안전장치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욕망이 과도한 가정의 예를 들어보죠. 어머니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닥달할 때 아버지가 "이름 석 자 쓸 줄 알고 예의범절 지킬 줄 알면 됐지, 애를 왜 그렇게 괴롭히냐. 맹꽁아, 나가서 놀아라"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모델 2가 안전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것은 대체로 불가능해 지고 있습니다. 고원 위와 고원 아래 사이의 격차가 심대하고, 그 중간지대가 사실상 없다시피 한 현실 속에서, 이와같은 종류의 아버지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신! 지금 열심히 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거 몰라? 나중에 맹꽁이가 지잡대 나오면 입에 풀칠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 같은 식의 어머니의 반론에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아버지가 나서서 공부를 강요하는 집안의 경우에도 안전장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주체는 공부하라-초자아를 형성하게 되지만 모델 1에서 어머니가, 모델 2에서 아버지가 떠맡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안전장치를 제공받지 못하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규범들이 초자아 안에서 자리를 할당받지 못하거나 너무 적은 몫만을 부여받고, 오직 공부하라-초자아, 자유주의적 세계에서 경쟁하여 이겨야한다는 초자아만이 남았을 때 발생하는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인성교육에 대한 요청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것마저도 "대학 입시에서 인성을 평가 요소로 삼게 하겠다. 그러면 다들 인성교육에 열심히 참여하겠지? 히히" 같은 식으로 공부하라-자기계발-초자아의 그물망 안으로 포섭되고 맙니다. (참조: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92438&plink=TOP&cooper=SBSNEWSEND )

교육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높지만, 결국 교육 정치 영역에서 정책 기조를 결정할 수 있는 선출직 고위 관리들을 뽑는 '표심' 은 "우리 아이가 명문대에 진학하는 데에 유리할 수 있는 정책을 펼 것 같은 사람" 을 뽑는 방식으로 움직이니, 개혁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배경이 이러하니 사교육 잡는다, 입시 지옥 불길 잡는다, 하면서 정책들이 만들어 지더라도 입시 지옥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만들 뿐입니다.

050707_01.jpg
▶︎ 모델 2 에서와 같은 어머니의 욕망이 주체 안에 자리를 잡은 후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경우

050707_03.jpg
▶︎ 성적이 낮으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 없어야 한다. 왜냐? 고원 아래로 추락하게 될 테니까.

과거 급훈의 형식은 "정직 양보 사랑", "근면 우애" 와 같은 식이었다. 그러나 그 형식이 더이상 절대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 '전통적 초자아' 가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와같은 모성적 초자아, 자유주의적 경쟁의 이념이다.


제가 사용하는 초자아 개념에 따르면, 초자아의 명령은 명령의 형태를 띤, 주체에게 심어진 타자의 욕망입니다. 모델 1에서 아버지의 명령이 "예의바르게 행동해라" 였고 이에 따른 초자아가 주체의 정신에 형성되었다면, 결국 이 초자아가 명하는 바는 아버지가 원했던 바입니다. 초자아는 곧 타자의 욕망입니다. 초자아의 명령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하는 주체는 괴로움에 빠집니다. 자아 이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자존감이 하락합니다. 잉여 정서를 통해 죄책감을 승화시키는 이들은 그나마 아직 괜찮은 상태에 있는 셈입니다.

초자아의 명령을 이행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단념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다른 구원의 길이 어느날 홀연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를들어 애국의 길이 그것입니다. 애국 초자아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해 짐으로써 주체는 다시 자아 이상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이것은 자존감(나르시시즘)을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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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하품마렵다님의 댓글의 댓글

하품마렵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 ㅎㅎ 물론 학급회의 시간에 저런 급훈을 설정하면서 학생들은 저게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웃긴 했을 거예요. 근데 그게 뼈 있는 웃음인 거지요. 급훈 뿐만 아니라 문구사에서 판매되는 공책 중에도 표지에 익살스러운 그림과 함께 저런 문구가 들어가 있는 상품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요즘도 파는지 모르겠는데, 2013년도에 마지막으로 봤으니 아직 있지 않을까 싶기도... "10분 더 공부하면 신랑 직장이 바뀐다", "10분 더 공부하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 "니 성적에 잠이 오냐" 뭐 이런 것들요

가아닌양님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초자아의 명령을 이행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단념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다른 구원의 길이 어느날 홀연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예를들어 애국의 길이 그것입니다. 애국 초자아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실해 짐으로써 주체는 다시 자아 이상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이것은 자존감(나르시시즘)을 회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

->마지막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애국 초자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베등의 사람들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그들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 가장 잘 맞는 사람들 아닌가요. "내 이웃(공동체)을 증오하라!!", 그리고 이것은 일베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신이겠지요. 그들이 스스로를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오늘날 한국에서 "애국"은 타자에 대한 증오의 형식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 추천 1

하품마렵다님의 댓글의 댓글

하품마렵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해가 안 된 다는 부분이 나르시시즘 부분인가요? 그건 일베 하는 사람이나 혹은 아니더라도 자신을 애국자로 여김으로써 그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혹은 적어도 뿌듯하게 여기는 심적 기제를 얘기한 거예요.

저는 "그들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 가장 잘 맞는 사람들 아닌가요." 이 말씀으로 가아닌양님이 제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캐치를 못 하겠습니다. 질문 아니면 반론인데, 마침표로 맺은 걸로 봐선 반론인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대한 반론인지 모르겠습니다. 앞뒤 맥락을 좀 더 많이 포함해서 다시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가아닌양님의 댓글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가정 1. 일베 혹은 어버이 연합의 애국주의는 공동체 혹은 이웃에 대한 혐오의 다른 양식이다.

가정 2. '잉여'라는 표현양식은 공동체를 통한 인정, 혹은 자신의 취향에 대한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거부양식이다.

가정 3.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살아남기)'에 대한 집착은 타자를 완전히 적화시키는 것을 통해 완성된다. -배틀로얄 사회

결론 1.  애국의 길은 성공(자신만 살아남기)에 대한 초자아의 단념을 통해 열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다.

결론 2. '잉여'라는 표현은 초자아의 반작용이 아니라, 초자아에 복종하는 개인이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양식이다. -> '취향'에 대한 공동체적 인정요구에 대한 포기.

결론 3. 전제 1, 2(결론 1, 2)는 전제 3에 의해 동시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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