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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오월민중제에 초대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오월민중제공동준비위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댓글 1건 조회 3,927회 작성일 04-04-26 06:09

본문

- 오월민중제에 초대합니다 -

올해도 지나간 스물 세 해처럼 오월이 되면 빌레펠트시의 우베디센 이라는 산골마을에서 배달의 자손들이 모여 광주항쟁의 넋을 기리는 행사를 갖는다.


오월민중제는 광주항쟁이 있었던 이듬해부터 시작 되어 해마다 열리게 되는데 특히 1세대와 2세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각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며 또 하나는 국내를 제외하고는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민중항쟁 기념행사가 개최되는 곳으로서 독일이 세계유일하다고 한다.

교포들의 세미나에서는 시사성이 있거나 근대사에서 중요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다른 방에서 열리는2세들의 세미나에서는 주로 자신들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거나 한국상황을 알기위한 주제들이 선택된다.

민중제는교포 제1세와 2세가 만나는 중요한 자리이며 동시에 2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를들어 몇해전 민중제에서 2세들이 부모들의 독일이주 역사를 세미나 주제로 다루면서 민중제에 참석했던 어른들을 한 사람씩 맡아 면담을 한적이 있다. 교포들의 이주동기와 배경, 이주민으로서의 삶, 이주초기의 이상과 현실, 앞으로의 비전 등 구체적인 내용의 면담과정에서 1세와 2세가 함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었다.
이러한 공감대는 우리 자녀들과 부모세대가 가진 문화적인 갈등을 좁히고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이바지했음은 물론 2세들 자신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올해 민중제에서는 1세들은 6.15공동선언의 의미와 그의 실현 이라는 내용를 중심으로 발제와 토론이 있을 예정이며 2세들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그 정치적, 사회적 배경, 외국인노동자들의 상황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다.
2박3일의 행사일정이 딱딱한 세미나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1세와 2세가 어우러져 문화행사 및 대동놀이를 하는 흥겨운 시간이 열리기도 하고, 또한 건강을 위해 맑은 공기속에서 기공을 연마하는 시간도 갖게된다

참석하시고 싶은 분들은 아래 주소로 연락해 주십시요. 환영합니다.

때: 2004년 5월 14일 - 5월 16일(금 - 일)
곳: Naturfreundehaus Bielefeld Ubbedissen
Detmolder Str. 738 Tel. 05202- 802 89
주최: 5월민중제 공동준비위원회
베를린지역 참가자들은 5월 14일(금) 15시.30분 지하철역 Fehrbelliner Platz 버스정류
장에서 전세버스로 출발합니다. 선착순 47명 정원, 학생과 청년들은 버스비 무료

참가비(숙식비 및 음료수 값 포함): 성인 42 Euro 학생/청년: 22 Euro

연락처: 윤운섭 030-803 39 64 서의옥 030-614 61 68 mail: herimda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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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님의 댓글

퍼온글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현 국회의원인 심재철과 유시민이 주동하였던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 때 대학생들이 탈취한 버스로 전경들을 뒤에서 받아 여러 명을 죽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사태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5월 18일 광주사태 때는 학살 유언비어와는 달리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그렇다면,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나 5월 18일 광주사태나 과격시위의 성격은 흡사한데, 왜 유독 한쪽만 사태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에 비해 518광주사태는 혁명의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광주사태는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의 연속타였다.  만일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가 없었다면 광주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5월 15일 대학생들이 비겁한 수단으로 전경들을 죽이면서까지 서울역 집회를 가져야 했을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다.  없었다.  1979년 10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과도기 정부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 10개월 이내에 선거법 제정과 대선 선거관리를 마치고 정권을 새 정부에 이양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양김씨는 그 약속을 믿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초에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이었으며, 현 국회의원 심재철에게 걸려온 (우리가 그 발신자는 간첩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는) 괴전화가 한국 근세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괴전화였다.  당시 심재철은 그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는 괴전화에 속아서 이용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 유언비어에 한마디 덧붙여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순식간에 서울 대학가에 쫙 퍼진 이 유언비어는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에서 사상 초유의 십만 명이 넘는 학생 시위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심재철에게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로, 그리고 다시 박관현에게서 광주의 혁명가 윤상원에게 전해진 이 유언비어는 점점 증폭되어 윤상원은 광주시민들에게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광주 시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졸업자이면서도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좌익 노동 운동을 하고 있던 윤상원은 공산주의에 물든 혁명가였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박관현이 심재철로부터 전해 주었던 전두환 쿠데타 유언비어를 사실로 여겼던 듯하다.

 

  그리고, 윤상원이 5월 18일 10시부터 계엄군 학살 유언비어를 광주 일대에 퍼나르게 된데는 심재철-박관현, 박관현-윤상원의 연락 고리 외에 또 하나의 출처가 있었다.  5.18일 오전 10시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누군가가 연합통신 기자를 사칭하면서 외치던 함성은 "400만도민 학살지령이 떨어졌다"였다.  이렇게 유언비어를 조작하여 광주사태를 일으킨 자가 지금 5.18기념사업회 간부로 지방에서 책임을 맡고 있다는 데에 5.18 단체들의 위선이 있다.

 

  사실, 당시 윤상원이 "전두환 쿠데타" 유언비어와 "400만도민 학살지령" 유언비어에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는 김대중이 5월 22일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김대중의 쿠데타 거사 계획이 5월 16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김대중 홍위병 몇명이 검거될 때 탄로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윤상원의 시각에서는 5.17 긴급조치는 두개의 쿠데타의 충돌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5.18광주사태를 "민주항쟁" 혹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자고 하는데,  이 두 용어 모두 잘못된 용어들이다.  우리는 정치적 이익 집단이 일으킨 쿠데타를 "민주항쟁" 혹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당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이기동씨는 전남 광양 출신인데, 김대중 일가에서 동향 사람으로 여기는 막역한 관계이다. 

 

  이기동은 그가 1999년 7월호 신동아에 기고하였던 특집기사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에서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사실이었으며, 그럼에도 자기가 김대중을 어떻게 보호하여 주었는지를 증언하였다: 


<<나는 “이 여사님, 제가 직접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기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회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저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씨는 체념한 듯 A4용지 두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

 

  ‘예비내각’ 명단이란 무엇인가?  요즘 아이티에서는 반군과 정부군간에 시가전이 한창이다.  왜 반군인가?    ‘예비내각’ 명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6.25때 북괴군의 남침이 침략이었는가?  '예비 시장"명단을 가지고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4월에는 김영삼씨 지지자들과 각목 들고 싸우던 김대중씨 일행이 선거를 거치지 않고 민중봉기로 집권하는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내각을 개각하여 하였던 이런 시도는 법치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므로 "민주항쟁"도 "민주화운동"도 아니다.

 

  왜 광주사태가 일어났는가?  과잉 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광주사태가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는 폭도들이 도청을 점령하려 하였으며, 계엄군은 결사적으로 도청을 지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총검과 수류탄과 장갑차로 무장한 폭도들이(혹은 칼과 낫으로 무장한 시민군까지 합친 이십 만 명이) 200명 미만의 군인들이 지키는 도청으로 쳐들어가며 장갑차로 군인들을 깔아죽일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무엇 때문에 광주 방송국들과 세무소를 불태우며 교도소를 습격하였는가?  이것은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혁명군은 제일 먼저 도청 소재지를 정복한다.  여기에 군인들은 도청과 공공시설을 보호하여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시민군의 기관총 공격에 밀린 계엄군에게 처음으로 공포탄이 지급되면서 5월 21일 자정에 도청에서 철수하여 광주외곽으로 도망하자마자 시민군은 광주에 해방구(공산주의 자치 행정구)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광주사태이다.

 

  5.17 긴급조치는 김대중의 5월 22일로 예정된 내란 거사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취하여졌겠지만, 그럼에도 이미 5월 22일 민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그의 추종 세력들이 강행한 것이 5.18광주사태이다.  그래서 그들은 파출서를 모두 파괴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은 도청을 경비하는 군인들을 공격하였으며, 예정대로 5월 22일 도청을 정복하고 궐기대회를 열었으며, 전국적으로 민중봉기를 확대시키는 작전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폭도라는 말에 가려진 사람들 하나 하나는 착하고 선량한 소시민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광주사태의 특징은 조선대 김종배(당시 31세) 등 몇명을 제외하고는 학생이 없다는 사실이다.  누가 시위대였는가?  대부분 고아, 구두딱이, 떼밀이, 무직자, 노동자들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들의 증언은 그들의 가난한 삶 서술로 시작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착한 사람, 그러나 세상이 뒤집힐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혁명 투사로 돌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빨갱이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들의 입장을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광주사태의 불가사의 그 배후에 분명 북한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한 예가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하자마자 정체 불명의 사람들이 도청 지하창고에 순식간에 광주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TNT를 설치하였다.  만일 간첩이나 폭도가 폭파시키기 전에 한 군인이 목숨을 걸고 5월 25일~26일 양일간에 폭약 뇌관을 일일이 분리시키지 않았다면 광주시는 언제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광주시민이 혹은 민주화운동가가 전남도청에 다이너마이트 폭발 장치를 설치하였는가.  아니다.  광주 사태 배후에 북한 세력이 있었다.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된 때는 5월 21일(음력 사월 초파일:부처님의 탄생일)이었다.  그런데, 5월 19일 또 다른 시민군이 이미 나주에 침투하여 오후 1~3시 사이에 예비군 무기고에서 2000 여정의 총기류와 중화기 수류탄등이 탈취되었다.  그 시간대이면 아직 광주 사태 희생자가 없었던 때였는데 무엇을 위하여 수천 정의 총기류가 필요하였단 말인가?  우리는 그 시민군이 광주 시민이었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간첩단이었을 가능성이 많음은 그들은 나주 경찰서 병력이 김상윤서장의 인솔로 광주의 도청 경비 작전에 동원되었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경찰 병력이 (서장직무대행을하던 김계수 경무과장과  잔여 병력이 20여명을 제외하면) 텅빈 틈을 타 무기 약탈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나주 채석장에 여러 리어카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보관되어있었다는 사실은 현지 주민들도 모르던 비밀이었는데 폭도들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도청에 내려놓자마자 재빠르게 폭파 장치를 했다는 사실은 그 폭도들이 평범한 광주 시민군이 아니라, 특수훈련을 받았을 북한군이었을 의심을 더해 준다.

 

  그러면 북한군이 왜 도청에 다이너마이트와 TNT 폭파 장치를 해 두었을까?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아니다.  당시 북한군 병력을 휴전선 일대에 총집결시키고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던 김일성은 도청 폭발과 더불어 남침하려는 작전을 세워두었을 것이다.  만일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누가 무엇때문에 몇톤 분량의 다이너마이트 폭발 장치를 도청 지하창고에 해놓았는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광주사태 배후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시민군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朴南宣(당시 35세)은 그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정말로 겁에 질려 있던 쪽은 시민들이 아니라, 시민군 인파에 비해 숫적으로 훨씬 열세였던 공수부대원들이었다고 말한다.  시민군의 증언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두 공수대원에게 수갑을 채워 무릎을 끊게 한 다음 자리에 앉히려는데, 이들을 잡아왔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황실 안팎이 소란스러워졌다. 『트럭 뒤에 매달고 다니면서 돌로 쳐 죽여야 해!』『분수대 앞으로 끌어내 공개적으로 총살시킵시다!』무릎이 꿇려진 공수대원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5월 22일)>>

 

<<『잡아온 계엄군은 어디 있소?』『저기 있습니다』조사반장이 손을 들어 사무실 한쪽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양손에 수갑을 차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얼룩무늬 군복차림의 공수대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는 듯 입술까지 창백하게 변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순간 증오심이 타올랐다.『어이! 조사반장, 저 자를 이리 데려오시오. 수갑도 풀어주고』손목이 자유로워지자 약간 긴장이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소속부대는?』『상무대 급양대 소속입니다』『이름은?』『병장 김기범입니다』『언제 어쩌다 잡혔나?』『조금 전 외곽병력에 보급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잡혔습니다』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다리는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5월 26일)>>

 

    당시 광주 시민 대다수는 무기 반납을 원했는데, 폭도들은 총기로 위협하며 무기 반납을 막았다.  심지어 그들은 부지사까지 총기로 위협하였다.  신동아 1988년 5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朴南宣은 그것을 이렇게 증언한다.

 

<<무장병력 20여명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2층 복도와 부지사실 문앞에 M16으로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키고 내 지시가 있으면 무조건 전부 사살해버리라고 명령한 뒤 부지사실 문을 군화발로 차고 들어갔다.부지사실에는 독립투사인 최한영수습위원장과 부지사 정시채, 장휴동 등 광주의 저명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어들고 하늘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가 천천히 내려 그들을 겨눈 채『어느 놈이 마음대로 무기반납을 결의했느냐?』고 악을 버럭 쓴 뒤『앞으로 이제까지의 죽어간 사람들의 피를 배반하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수습위 일행중 노수남이 일어나면서『지금 무슨 짓거린가? 이제 더 이상의 피를 흘리지 말고 이대로 끝내버리세.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자는 것인가?』고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쏘아버리겠다는 듯이 권총을 겨누었다가 차마 쏘지 못하고 권총의 손잡이로 노수남의 등을 찍어내렸다. 그는 픽 쓰러졌다. 맞아 떨어진 노수남, 노기와 살기가 등등한 나의 행동으로 부지사실은 완전히 얼어붙어버렸다.『시민의 전체의사를 무시하고 계엄당국과 내통하여 무조건 무기를 반환하자거나 하는 놈이 있으면 모두 죽여버릴테니 모두 도청을 떠나시오! 알았소?』.(5월 25일)>>

 

  당시 대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폭도들이 아니라, 선량한 시민들이었으며 수습을 원하는 온건파였다.  단지 수습하자는 말을 하다가는 강경파로부터 생명에 위협을 당하였을 뿐이다.  그것을  宋基淑 전남대교수(당시 수습위원)는 그가 1985년 7월에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전남대 학생들이 『전남대 교수로 유신정권때 해직됐다 복직된 송기숙 교수』라고 내소개를 하자, 다시 『뮛 때문에 왔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더이상 사태가 악화되어서는 안된다. 모두 한 발짝씩 물러서서 수습의 길을 찾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그중 한명이 나서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수습은 무슨 수습이냐』며 내 목에 총을 들이댔다. 두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이 증언문에서 송기숙 교수 목에 총을 들이댄 자가 학생인지 광주 시민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법치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화 중 교수 목에 총을 들이대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니다.  전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렇게 혁명을 위해 인륜마저 저버리는 일은 북한군이나 하는 일이지, 법치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시민 사회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북한군 장교처럼 행세하는 일이 총과 무력으로 여론을 지배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그들이 대학생이거나 광주 시민이었을까?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우리가 광주사태 배후에는 분명 불순분자가 있었다고 판단하는 이유가 있다.  설사 그들이 북한군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무언가 불순한 동기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사람은 정의를 위해서 부지사와 교수와 광주시 각계 지도자들의 목에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지 않는다. 

 

  이 경우 김대중 홍위병들은 전라도 부지사와 송기숙 교수 등 수습위원들의 목에 총을 들이댄 자는 민주화운동 유공자라는 논리를 제시한다.  지금도 그들은 그 논리에 승복하지 않는 자들을 위협한다.  그러나, 광주사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이 가능하다.  당시 북한군은 광주사태가 조금만 더 확산되면 총공격할 태세였다.  그런데, 누가 김일성의 꼼수를 깨부스었는가?  바로 용감한 광주 시민들이다.  나라를 지키는 국군에게 총을 쏠만큼 용감한 폭도들이 아니라,  강경파의 갖은 위협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강경파와 싸우며 광주사태 확산을 저지하였던 용감한 시민들이 광주시를 지켰던 것이며, 그들이 광주시를 지켰을 때 그들은 대한민국을 북괴군의 남침으로부터 지켜냈던 것이다.  그렇다, 광주의 진정한 명예는 북한군 냄새나는 행동을 하였던 강경파가 아니라, 진정한 용기로 강경파와 싸웠던 온건파 시민들에 의해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광주 시민들 중 그 누구도 총을 든 폭도들이 지배하는 무법천지로 광주가 잠시나마 되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무엇이 그들로 그토록 대담한 행동을 하게 하였을까?  한 시민은 그 단서를 이렇게 밝힌다.  <<당시 유언비어 가운데 서남부지역 에서만 나도는 내용중 하나가 광주 민중봉기가 성공하면 김대중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이미 시장 군수를 할수있다는 해괴한 유언비어가 광주 이외 지역에서 번졌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합니다.>>  이 유언비어를 뒷받침하는 것이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이 기록된 문서이다.  당시 광주에서 혁명을 공연하는 극단이 있었으며, 혁명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에는 소외 계층이었던 사람들이 투쟁 지도부를 구성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광주사태를 사회학적 시각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소외된 계층의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군경에게 총을 쏘도록 선동하며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가?
 
  당시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씨의 주도로 결성된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연청)’은 5월 22일에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혹은 김대중 문서의 표현대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를 일으킬 때 전국적인 청년 봉기를 일으키도록 되어있었는데, 광주사태와 연청은 어떻게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누가 무엇때문에 광주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도청 지하창고에 했을까?  어쩌면 그 의문의 열쇠 중 하나를 당시 김대중 지지 시위 중심에 있었으며, 518유공자 포상법을 입안한 동교동계 인사들 중 하나이며, 518유공자 포상을 받은 이해찬 의원이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적으로 하야시키고 새 내각을 구성하려던 김대중의 쿠데타 계획과 더불어, 소외 계층의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불붙은 혁명 분위기의 불길, 그리고 남한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 남침하려던 김일성의 꼼수 이렇게 세 가닥의 실이 한데 엉켜 있던 것이 광주사태였다.
    _______________
    1)  1980년 5월에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이기동씨가 1999년 7월호 신동아에 기고하였던 특집기사 "남산 지하실에서 만난 김대중·김홍일·한화갑"은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2)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朴南宣(당시 35세)이 1985년 7월에 월간조선에 기고한 증언록은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06.html 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library/


    http://cafe.daum.net/futurekorealab


    http://cafe.daum.net/paaran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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