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학대사진을 누가 유포시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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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쟁터의 양심이름으로 검색 조회 3,456회 작성일 04-05-20 23:42본문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잔혹사’는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Whistle-blower)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육군 소속 기계병인 조 더비 상병은 어느날 포로 학대 사진을 우연히 접하게 됩니다. 그는 충격에 빠졌고, 직속 상관 모르게 군 범죄 조사단 사무실 안으로 사진을 밀어 넣습니다. 그의 판단과 행동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아군을 위험에 빠트린 배신 행위’와 ‘진정한 애국심’으로 크게 엇갈립니다.
그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 사람 중에는 한 퇴역 군인이 있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헬기 조종사 휴 톰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또한 당시 ‘내부 고발자’였기에 더비 상병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것이지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톰슨은 마이라이라는 지역으로 비행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군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게 되죠. 미군이 양민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본 겁니다. 마이라이는 미군이 500여명의 베트남 양민을 학살해 미군의 역사상 가장 큰 불명예를 남긴 곳입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의 머릿속에는 죄 없는 양민을 구해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군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습니다. 베트남이 비록 적국이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는 ‘아군’을 적으로 간주한거죠.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이 불거지자 미국 언론들은 당시의 사건과 톰의 용기있는 행동을 새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소개한 1968년 당시 마이라이의 상황을 약간 각색해 들려드리겠습니다.
1968년 3월 24살. 헬기 파일럿 휴 톰슨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베트남 정글 위를 날고 있었다. 목적지는 마이라이. 작전의 목표는 베트콩을 교란시켜 적의 화력을 마이라이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톰슨과 동료들은 총구를 아래쪽으로 겨눈 채 찬찬히 상황을 살폈다. 지상에 베트콩의 모습이 비치기만 하면 즉각 발포를 할 태세였다. 그러나, 막상 마이라이 상공에 도착했을 때 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베트콩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곳에는 오히려 미군 병사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평온해야할 마이라이의 마을 풍경이 웬지 심상치 않았다. 어린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마을 주민들이 온통 겁에 질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론 미군들이 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마을 한 귀퉁이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 곳으로 떠밀리고 있던 차였다. 겁에 질려 대열을 이탈해 달아나는 주민에겐 가차없이 총격이 가해졌다. 한 편에선 미군들이 한 집 건너 한 집씩 차례로 불을 지르고 있었다.
‘우리 동료 군인들이 양민을 죽이고 있다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톰슨은 앞뒤 잴 것 없이 전진하는 미군들 앞에 헬기를 착륙시켰다. 그리고, 헬기의 소총수들에게 명령했다.
“만약, 미군이 양민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인다면 즉각 미군을 향해 발포하라.”
아군끼리 교전을 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 그러나 다행히도 우려했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톰슨은 양민을 내몰던 미군을 제지하고 11명의 베트남인을 헬기에 태워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톰슨은 즉각 이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했다.
그의 보고로 인해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다. 사건의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당시 학살 사건을 지휘한 장교는 1971년 군법정에 회부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이 형기를 줄여준 덕에 그는 3년 가택 연금형으로 죄값을 대신 했다.
톰슨은 이렇게 해서 미군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내부 고발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 다.
모든 내부 고발자가 그렇듯 톰슨도 그 사건 뒤로 한동안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의 행동이 매국 행위였다는 비난이 군대 안팎에서 일었던 것이지요. 동료 군인들은 그와 대화조차 나누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어느날엔가 집 현관문을 나섰을 땐 마당에 죽은 동물의 시체가 놓여있기도 했죠. 한 하원 의원은 “마이라이 사건으로 인해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바로 톰슨이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행동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대우를 받습니다. 그의 행동은 진정한 책임 의식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힙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30년이 흐른 1998년에는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부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행동을 이해해준 동료들로부터 받은 훈장입니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선 당시 사건과 톰슨의 행동을 생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톰슨은 직접 군 부대를 돌며 후배 병사들에게 당시의 교훈을 들려주곤 합니다. 그의 강연의 요점은 간단 명료 합니다.
“나는 병사들에게 말합니다. 옳은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라고 말입니다.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말라는 충고도 빼놓지 않습니다.”
이번 포로 학대 사건을 바라보는 61세의 퇴역 군인 휴 톰슨의 심정은 어떨까요. 애써 잊으려던 악몽과도 같은 과거가 또다시 떠올라 번민의 밤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병사들이 역사의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고 개탄했습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육군 소속 기계병인 조 더비 상병은 어느날 포로 학대 사진을 우연히 접하게 됩니다. 그는 충격에 빠졌고, 직속 상관 모르게 군 범죄 조사단 사무실 안으로 사진을 밀어 넣습니다. 그의 판단과 행동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은 ‘아군을 위험에 빠트린 배신 행위’와 ‘진정한 애국심’으로 크게 엇갈립니다.
그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 사람 중에는 한 퇴역 군인이 있습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헬기 조종사 휴 톰슨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또한 당시 ‘내부 고발자’였기에 더비 상병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것이지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톰슨은 마이라이라는 지역으로 비행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군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끔찍한 현장을 목격하게 되죠. 미군이 양민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본 겁니다. 마이라이는 미군이 500여명의 베트남 양민을 학살해 미군의 역사상 가장 큰 불명예를 남긴 곳입니다.
현장에 도착한 그의 머릿속에는 죄 없는 양민을 구해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군을 향해 총구를 겨냥했습니다. 베트남이 비록 적국이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는 ‘아군’을 적으로 간주한거죠.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이 불거지자 미국 언론들은 당시의 사건과 톰의 용기있는 행동을 새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소개한 1968년 당시 마이라이의 상황을 약간 각색해 들려드리겠습니다.
1968년 3월 24살. 헬기 파일럿 휴 톰슨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베트남 정글 위를 날고 있었다. 목적지는 마이라이. 작전의 목표는 베트콩을 교란시켜 적의 화력을 마이라이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톰슨과 동료들은 총구를 아래쪽으로 겨눈 채 찬찬히 상황을 살폈다. 지상에 베트콩의 모습이 비치기만 하면 즉각 발포를 할 태세였다. 그러나, 막상 마이라이 상공에 도착했을 때 적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베트콩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곳에는 오히려 미군 병사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평온해야할 마이라이의 마을 풍경이 웬지 심상치 않았다. 어린아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마을 주민들이 온통 겁에 질려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등 뒤론 미군들이 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마을 한 귀퉁이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 곳으로 떠밀리고 있던 차였다. 겁에 질려 대열을 이탈해 달아나는 주민에겐 가차없이 총격이 가해졌다. 한 편에선 미군들이 한 집 건너 한 집씩 차례로 불을 지르고 있었다.
‘우리 동료 군인들이 양민을 죽이고 있다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톰슨은 앞뒤 잴 것 없이 전진하는 미군들 앞에 헬기를 착륙시켰다. 그리고, 헬기의 소총수들에게 명령했다.
“만약, 미군이 양민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인다면 즉각 미군을 향해 발포하라.”
아군끼리 교전을 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 그러나 다행히도 우려했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톰슨은 양민을 내몰던 미군을 제지하고 11명의 베트남인을 헬기에 태워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톰슨은 즉각 이 사실을 상관에게 보고했다.
그의 보고로 인해 이 사건은 널리 알려졌다. 사건의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갔다. 당시 학살 사건을 지휘한 장교는 1971년 군법정에 회부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이 형기를 줄여준 덕에 그는 3년 가택 연금형으로 죄값을 대신 했다.
톰슨은 이렇게 해서 미군 역사상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내부 고발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 다.
모든 내부 고발자가 그렇듯 톰슨도 그 사건 뒤로 한동안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의 행동이 매국 행위였다는 비난이 군대 안팎에서 일었던 것이지요. 동료 군인들은 그와 대화조차 나누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어느날엔가 집 현관문을 나섰을 땐 마당에 죽은 동물의 시체가 놓여있기도 했죠. 한 하원 의원은 “마이라이 사건으로 인해 처벌받아야 할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바로 톰슨이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행동은 영웅적인 행동으로 대우를 받습니다. 그의 행동은 진정한 책임 의식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힙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30년이 흐른 1998년에는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부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행동을 이해해준 동료들로부터 받은 훈장입니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선 당시 사건과 톰슨의 행동을 생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톰슨은 직접 군 부대를 돌며 후배 병사들에게 당시의 교훈을 들려주곤 합니다. 그의 강연의 요점은 간단 명료 합니다.
“나는 병사들에게 말합니다. 옳은 일을 하라고 말입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라고 말입니다.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말라는 충고도 빼놓지 않습니다.”
이번 포로 학대 사건을 바라보는 61세의 퇴역 군인 휴 톰슨의 심정은 어떨까요. 애써 잊으려던 악몽과도 같은 과거가 또다시 떠올라 번민의 밤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병사들이 역사의 교훈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고 개탄했습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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