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에 즈음해.. …
페이지 정보
작성자 그라스이름으로 검색 조회 4,233회 작성일 04-06-05 13:53본문
60년전인 1944년 6.6일 미.영.캐나다.프랑스 연합군이 노르망디 지방의 "오마하"(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배경이 된 곳 : 상륙작전 중 가장 희생자가 많았음), "유타", "골드", "주노", "스워드" 라는 다섯개의 암호명을 부친 해변에 상륙합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의 회고록 제목대로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한 "십자군 전쟁"이 시작 된 것입니다.
독일측 사령관은 노르망디 담당인 B집단군 사령관 롬멜 이었습니다. 6월 4일에 날씨가 안좋은 것을 본 그는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6.6일 이었던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독일로 돌아갑니다. 아내의 생일이 연합군의 공격일이라니..기묘한 역사의 우연이지요.
미군 최정예 부대인 101, 82 공수사단과 영국 제6공수사단이 노르망디 도처에 낙하해서 독일군을 교란 시켰고 이에 독일군 측은 연합군이 영국에서 가까운 "빠 드 깔레"에 상륙하기 위해 양동작전을 피고 있다며 전략 예비군 투입을 주저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히틀러는 수면제를 먹고 자고 있어서 참모장인 요들 장군이 깨우지 못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노르망디에서 싸운 한국인도 있습니다.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만주에서 38년의 노몽한 전투에서 쏘련군에 포로가 된 한국인이 쏘련군에 편입되어 후에 다시 독일군에 포로가 되고 소위 오스트바탈리온 으로 연합군과 싸우다가 미군 101사단에 포로가 된 기록과 사진이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중요하긴 하지만 2차대전의 전환점은 아닙니다. 사실 43년 쏘련에서의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치타델 작전)가 2차대전 뿐만 아니라 그후 50년의 전환점 이었지요(이떄 독일이 이겼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노르망디에서 당시의 참전자들과 슈뢰더 총리를 포함한 각국 관계자들이 모여 60주년 기념 행사를 치루려 합니다. 슈피겔지에 보니 기민당에서 슈뢰더가 독일군 묘지를 참배하지 않는다며 비난 하긴 했지만 정부 대변인은 한마디로 일축하더군요. 하지만 체코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지도자들은 환영하는 눈치 입니다. 맨날 신사나 방문하는 일본애들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독일측 사령관은 노르망디 담당인 B집단군 사령관 롬멜 이었습니다. 6월 4일에 날씨가 안좋은 것을 본 그는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6.6일 이었던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독일로 돌아갑니다. 아내의 생일이 연합군의 공격일이라니..기묘한 역사의 우연이지요.
미군 최정예 부대인 101, 82 공수사단과 영국 제6공수사단이 노르망디 도처에 낙하해서 독일군을 교란 시켰고 이에 독일군 측은 연합군이 영국에서 가까운 "빠 드 깔레"에 상륙하기 위해 양동작전을 피고 있다며 전략 예비군 투입을 주저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히틀러는 수면제를 먹고 자고 있어서 참모장인 요들 장군이 깨우지 못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노르망디에서 싸운 한국인도 있습니다.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만주에서 38년의 노몽한 전투에서 쏘련군에 포로가 된 한국인이 쏘련군에 편입되어 후에 다시 독일군에 포로가 되고 소위 오스트바탈리온 으로 연합군과 싸우다가 미군 101사단에 포로가 된 기록과 사진이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중요하긴 하지만 2차대전의 전환점은 아닙니다. 사실 43년 쏘련에서의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치타델 작전)가 2차대전 뿐만 아니라 그후 50년의 전환점 이었지요(이떄 독일이 이겼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노르망디에서 당시의 참전자들과 슈뢰더 총리를 포함한 각국 관계자들이 모여 60주년 기념 행사를 치루려 합니다. 슈피겔지에 보니 기민당에서 슈뢰더가 독일군 묘지를 참배하지 않는다며 비난 하긴 했지만 정부 대변인은 한마디로 일축하더군요. 하지만 체코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지도자들은 환영하는 눈치 입니다. 맨날 신사나 방문하는 일본애들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것 같습니다.
추천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