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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판(版) "그 때를 아시나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미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605회 작성일 04-08-06 05:55

본문

스위스가 가난한 농업국가였다는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비참했었을줄은 몰랐네요.



(제네바=연합뉴스) 문정식 특파원
스위스 판 "그 때를 아시나요?" 스위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7천달러의 세계적 부국. 그러나 스위스가 잘 사 는 국가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타향살이 몇해던가!" 스위스는 산업혁명에서 소외됐고 지형적으로 산악이 많아 농사에 부적합한 국가 다. 스위스는 결코 지금처럼 잘 살던 국가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20세기 초반까지 스위스의 궁핍한 산악지대에서는 소년들이 독일에 대거 날품팔이 노동자로 일하러 나갔다는 사실이 최근 한 역사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역사학자 로레타 세글리아스는 스위스 동북부 그라우뷘덴 지역의 소년들이 보덴 호수를 넘어 독일의 슈바벤 지역으로 흘러들어간 뒤 날품팔이에 나선 과거사를 집중 연구, 그 결과를 최근 단행본으로 펴냈다.

당시 이 나라가 처한 열악한 경제 사정 때문에 스위스인들이 객지에서 날품팔이 에 나선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지만 미성년자들이 날품팔이를 위해 대거 외국 으로 건너간 것은 이례적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

스위스 소년들의 날품팔이는 지난 1800년대부터 시작돼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2월부터 날품팔이에 나섰으며 독일의 슈바벤까지 1주일을 꼬박 걸 어야 했다. 게중에는 6-7세의 코흘리개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도시락은 하루분만 지참해 극도의 추위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고 간혹 수도원들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여행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소년들이 혼자가 아닌, 무리를 지어 다녔다는 점. 연배가 높은 아이들이 앞장을 섰고 때로는 어른이 인솔하는 경우고 있었다. 날품팔이 소년들은 가을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날품팔이에 나선 소년들은 보통 매년 1천명선이었으며 흉작인 해에는 그 숫자가 늘어나곤 했다. 동북부의 장크트갈렌과 아펜젤러 등에서는 독일보다 가까운 오스트 리아로 넘어가는 날품팔이 소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 지역에서는 스위스 소년들을 거래하는 일종의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고 미국 신문에도 소개될 정도였다. 농장주들은 소년들의 몸상태를 이리저리 살핀 뒤 맘에 드는 소년을 데리고 갔다는 것.

노예시장 같은 모습이었지만 스위스의 날품팔이 소년들은 평상복과 일요일에 입 는 양복 2벌, 구두와 양말, 그리고 몇푼 안되는 돈을 노동의 대가로 받았다.

소년들은 구두는 일요일에 신기 위해 고이 모셔놓고 보통 맨발로 일했다고 한다.

한 목격자의 기록에 의하면 발가락의 동상이 심해 발톱이 빠지고 속살이 보일 정도 로 고생이 심했다. 발이 시리면 소의 오줌을 받아 추위를 녹였다고 한다.

노동의 강도가 가혹한 것은 스위스 성인이나 소년 모두에게 해당된 일이었다.

저자인 세글리아스는 날품팔이 소년의 약 20% 정도는 구타나 성적 학대에 시달린 것 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년들은 '날품팔이 시장'의 정보를 교환하는가 하면 못된 농장주들을 미리 알 려줘 서로를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슈바벤의 '날품팔이' 시장은 보통 3월에 열기 때문에 소년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출발했고 학교의 선생님들도 이를 묵인했다고 한다. 농장의 날품팔이가 공장에서 일 하는 것보다 낫다는 게 그라우뷘덴 지역 소년들의 일반적인 의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객지 날품팔이가 없어진 것은 농민들의 도시 이주, 관광업 의 번성으로 독일 농장으로 일하러 갈 필요가 줄어든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스위스의 역사를 보면 지난 19세기초 극빈 가정이나 미혼모, 이혼한 부모들이 적지 않은 어린이들을 농장이나 공장에 판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 1950 년대까지도 이런 일이 전국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이 슬픈 역사의 한 페이지는 사회적 터부(금기) 대상으로 치부돼 아무도 사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 전모가 차츰 밝혀지고 있는 것은 지난 5년간 `페르딩킨더'(독일어로 버림받 은 아이들이라는 뜻)를 주제로 한 서적과 다큐멘터리 필름이 꾸준히 출판되거나 제 작된 덕분이었다.

이들 저작물과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수만명의 아이들은 먹거리와 잠자리를 대가로 농장이나 공장에 팔려가 사실상 노예에 가까운 대접을 받 았고 심지어는 성적 학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페르딩킨더' 출신인 투리 회네거 노인(80)은 스위스 국제방송과의 대담에서 양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던 14세 시절의 삶은 일하고 자는 것의 연속인 '개같은 인생'이 었다면서 당시의 끔찍한 경험을 돌이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런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주인의 가족들이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동안 나는 한참 떨어진 계단 밑에 서 먹고 잤다고 소개했다. 심지어는 동물 사료를 먹으라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

"모두가 나를 피했고 탈출하려해도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회 네거 노인의 고백이다. 주인이 때리기라도 하면 모두가 얼굴을 돌렸다는 것이다.

회네거 노인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할 용의가 있는 소수의 '페르딩킨더' 출신 생 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언론인으로 일하다 은퇴한 그는 20년전 처음으로 책을 발 간, '페르딩킨더'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마르크 로이엔버거는 많은 생존자들이 치유할 수 없는 정신 적 상처를 입어 증언을 꺼린다고 설명했다.

로이엔버거에 따르면 다수의 '페르딩킨더'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정상적 삶을 살 수 없었다는 것. 페르딩킨더 출신에게서 아웃사이더나 범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 았다는 것은 통계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스위스 역사학자들은 1820년전의 통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해마다 최대 1만명의 버림받은 아이들이 팔려갔다고 추정하고 있다. 1850년부터 1900년 사이에 베른 칸톤 에서는 매년 6만명의 어린이들이 강제 노동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19세기 당시의 '페르딩킨더'는 주로 부모들이 행정당국에 넘기면 당국은 농장이 나 공장에 이들을 보내는 식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수용한 농장은 숙식을 제공 하는 대가로 당국으로부터 관리비를 받았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당국이 심지어 노예매매와 다를 바 없는 `공개 입찰'을 하기도 했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학자들은 공매가 1930년대 후반까지도 일부 도시와 마을에서 계속됐으며 당국 몰래 거래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당국이 이들을 관리한다는 것이 당초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당국이 알게 모르게 어린이들의 과로와 영양실조가 비일비재했고 농장주와 공장주의 구타에 시달리고 성 폭력을 당하는 사태가 지속됐다는 설명이다..

부모가 어린이를 버리는 관습은 주로 독일어 사용권에서 자행되고 있었지만 불 어권인 보 캉통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탈리아어권인 티치노 칸톤에 서는 많은 어린이들이 국경 너머로 가서 굴뚝 청소부 노릇을 해야 했다.

회네거 노인은 스스로가 '페르딩킨더'출신이지만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든 영화 인 페터 노이만은 조부로부터 '페르딩킨더'의 삶을 접한 경우다.

회네거 노인은 책을 낼 당시 "출판사측은 몇몇 장(chapter)을 빼거나 뜯어고칠 것, 증언의 강도를 낮출 것을 요구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이 런 일이 벌어졌다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으리라는 것이 출판사측의 입장이었다.

역사학자 로이엔버거는 당시 19세기와 20세기초만 해도 스위스가 가난한 농업국 이었고 저임 노동력의 수요가 높았다는 것이 한가지 설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자들은 정부에 연구자금을 지원할 것을 바라고 있지만 메아리가 없다면서 민 간 후원자를 기대하고 있으며 아직 자료가 충분치 않은 만큼 증언자들이 적극 나서 줄 것도 당부하고 있다고 스위스 언론은 전하고 있다.

jsmo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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