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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과연 전근대 한중일 서열은 조선>>일본이었나?

페이지 정보

작성자 FreudeAmLeb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8건 조회 4,603회 작성일 12-02-20 00:36

본문



전근대 사회에 무슨 1인당 GDP 통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열을 비교한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지만
그냥 심심해서 "애국자" 들에게 욕먹을 재미를 기대하며 낚시..
비슷하게 잠깐 쓰자면..

최소한 조선초기 이후로는 (보통은 고려시대부터로 보기도 하지만..)
한국의 국력이 일본을 능가한 적이 거의 없다..
일단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는 조사된 인구만 1200만..
실제 추정인구는 약 1600만 이상으로 본다.

전근대 사회에서 인구가 유의미한 이유는 농업이외의 산업발달이 미숙한,
또는 일부 고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비농업 경제분야가 있더라도 그런 분야가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남성이 군인이 유목민이 아닌 정주형의 동아시아 농업국가에서
인구는 그 자체로 국력의 상징이다. 인구가 바로 그 국가에서 부양가능한
사람의 머릿수를 나타내며 이게 바로 농업생산력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혹자는 조선의 막사발도 소중히 여기던 미개한 일본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일본의 공예 문화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도예분야에서 우리가 앞섰다고
모든 분야에서 앞섰을 거라는 근거없는 우월감은 근거없는 열등감 이상으로
되레 쪽팔린 짓이라고 본다.. 어떤 이는 일본이 조선을 앞선게 조선 도공을
대량 납치하여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자본을 축적해서 그런거..
라고 하는 분도 있는데 특히 도공납치가 집중된 규슈 영주들의 번 재정에
어느 정도 도움은 됐겠지만, 일본경제의 운명을 좌우할만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사치재는 희소성 때문에 사치재다. 값이 높으면 그만큼 시중에
나도는 양이 작고, 많이 팔아대면 그만큼 값이 헐해진다.. )

일본 외무상을 지낸 박무덕(도고 시게노리) 등 조선인 도공 후예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던 사쓰마번의 경우도, 농업 이외의 부수입으로
사쓰마 재정을 윤택하게 한 일등공신은 조선 도자기가 아니라
오키나와 흑사탕였다. 
(결국 루이비통이 아무리 명품이라도 나이키 매출은 못따라간다.. 뭐
 이런 이야기다.. 다만 유럽에서 일본이란 나라의 이미지를 업시키는데는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들이 많은 공헌을 했을 것이다. 그래봐야
 유럽 시장에서 도자기 본좌는 중국제 차이나였지만..)
 

어쨌든 인구추계표를 보면 일본이란 나라는 기원전 3~4세기경에
기존의 토착인 (아마 아이누계통)의 죠몬문화에서 주민의 골격 자체가
완전히 다른 (아마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계통) 야요이문화로 대체되면서
인구가 급팽창한다.

개인적으로 한반도의 남방계, 북방계..

난 이걸 부여, 고조선의 몽골로이드 북방계가
말레이계통 사람들이 살던 한반도 땅으로
점진적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혼혈화되는 과정에서 
말레이계통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수 몽골로이드도 아닌
한국형 남방계.. 즉 삼한인의 탄생과정으로 유추한다..

한반도와 일본이 연결되었던 시기에 한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에 걸쳐 존재했던 아이누 닮은 계통의 인종 중
일본 열도와 한반도가 바다로 갈라지면서
한반도 거주 아이누가 먼저 북방계와 점진적으로 혼혈화 되어
삼한을 이루고.. 그러다가 진시황의 중원통일~한제국 팽창기라는
격동기에 위만조선, 한4군 등으로 이어지는 북쪽의 혼란으로
이전과 달리 북방계의 급격한 남하가 시작되고 (백제의 탄생이라던지..)

그런 과정들 속에서 삼한지방의 신남방계가 새 터전을 찾아 도해하면서
구남방계인 아이누들을 밀어내고 야요이 문화를 시작하는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상상해본다면 " 왜 " 라는것은 민족개념이 아니라 인종개념..
실제 " 왜 " 라는 명칭부터가 민족명이라기보단 인종적 특성을 설명하는
측면이 큰 듯 싶기도 하고.. 결국 한반도 남부 삼한지방의 신남방계 "왜인"
들이 중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밀려 남하한 북방계에 터전을 빼앗기고
일본으로 도해해가는 과정.. 뭐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한마디로 가야, 임나, 일본에 걸쳐 존재한게 바로 이 신남방계
" 왜인 "들이었다.. 뭐 이런 가설이다. 
내가 보기엔 이걸 가지고 " 누구는 누구 민족의 속국이었느니 "
하며 말도 안되는 소리들 해대니까 한일 모두 웃겨보이는거고..

이런 흐름이 또 한번 보이는게 3~5세기경..
즉 신남방계 (순수 남방계와 순수 북방계의 혼혈) 왜인들이 걸쳐살던 
한반도 남부와 일본 서부지방에 아예 순수 북방계 몽골로이들이
대거 내려왔다는거.. 아마도 주로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떠내려온
부여족이 아닐까 싶다..

이미 고구려 초기에 부여를 평정했다면서 그 후 광개토대왕 때
또 부여를 정벌하고 어쩌고 하는데.. 사실상 이것도 부여자체가 
완결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부여족이라는 족속들의 이합집산하는
연맹체였으며 그 중 짱 비슷한 놈이 하나 나와서 왕노릇 (금와, 대소의
동부여처럼) 하다가 그게 정벌당하면 부족별로 흩어졌다가 다시
또 다른 부여추장 하나가 짱 먹어 재결집하고.. 뭐 이런 형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재밌는 상상..
즉 이렇게 고구려가 부여족들을 족쳐가는 과정에서 ( 그 완결은 광개토대왕)
부여족들이 수세기에 걸쳐 남하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백제 왕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상상이므로 나중에 따로 소설한번 쓰겠다.
다만 이 즈음의 백제 왕계표 연대를 보면 아예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간다.

그래서 나중에 무령왕이던가는 생뚱맞게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백제왕성도 "부여"씨였지 아마.. 
이런 부여 기마족의 남하가 직접적으로 또는 백제를 통해서 일본에
영향을 미치는 흔적들이 일본 일부학자들이 주장하는 기마민족 도래설..
(일마들도 그 기원을 부여에서 찾으려더군) 
이렇게 이어진다고 보고..


결국 인종적으로 한국이나 일본이나 애시당초 서로 다를 것도 없고
그렇다고 순수하게 따로 보존된 것도 아니고 떠밀려가고 섞이는 과정..
뭐 이렇다는거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있냐..가 아니라
쪽바리와 조센징의 씨가 따로 있냐는거지..

결국 한일의 민족차이는 슬라브,게르만 혈통.. 어쩌구 하는 
인종적 차이라기보다는 백제멸망 이후 교류가 희박해지면서
생기는 오랜 단절에서 생기는 차이라고 본다.

무슨 백제의 식민지였느니, 니네 천황이 백제계라느니.. 이런게 
아니란거다. 그리 따지면 영국 왕실은 일본 왕실이 백제계인 것보다
100배는 더 골수로 독일계 왕실이다. 1000년도 더 전에 백제계 피가
섞인거랑, 불과 200년전에 거의 독일 핏줄에 영국 왕실 핏줄 하나
달랑 섞인, 독일에서 나고 자라 독일만 쓰던 왕손을 데려다가 앉혀서
만든게 지금의 영국 윈져왕가니까 (세계대전으로 반독분위기 팽배하기
전에는 아예 하노버 왕가라는 독일식 이름을 사용했었고.. )

이야기가 엄청나게 샜는데..

어쨌든 백제 멸망하면서 한반도랑 일본열도랑 빠이빠이 하던 당시
일본인구 추계가 약 500~600만 정도.. 이때의 국력은 확실히 한반도 계통
국가들이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빠르면 고려시대, 아무리 늦어도
조선중기 이후가 되면 양국의 역관계는 완전히 역전된다.


한국인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 부분이 있는데..
조선인들은 중국을 " 중화 " 로서 가운데 놓고
변방중에서 조선이 으뜸으로 모화하는 예의바른 사대의 나라
(그래봐야 중국입장에선 착한 오랑캐지만.. )라는 1등꼬붕의
자부심.. 그리고 중화라는 중심에게 이쁨받는 자기와는 달리
별로 관심 못받는 미개한 일본.. 이라는 세계관으로 세상을
봤고, 당연히 일본도 그에 수긍하고 있었으리라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애들의 세계관, 그러니까 천하관은 뚜렷했다.
세계에는 3개의 천하.. 즉 중심이 있는데
그 3개가 당국(중국), 천축(인도) 그리고 지네 일본이라는거다..

조선은 그저 제법 쓸만하지만 (약탈에도 교역에도 문화교류에도)
어디까지나 중국이란 본좌 옆의 2인자 급으로 본거고..

임진왜란도 바로 그런 천하관에 의지하고 있다.
조선은 어차피 3개의 천하중 하나인 중국에 붙은 2인자니까
역시나 3개의 천하 중 하나인 일본이 "우리가 중국보다 쎄염" 하며
위력을 보여주면 사대하고 받드는 대상을 명나라에서 일본으로 바꾸고
대륙정벌의 심부름꾼 노릇을 충실히 할거란 망상...

물론 당시 아시아의 두 맹주 인도와 명나라...
이와 동급으로 놓기에는 체급이 워낙 달리는 일본만의 망상이었던지라
결국 100년넘게 전쟁질만 하고도 200년간 전쟁이란걸 모르고 살던
나라에서 보급 문제등으로 수렁에 빠지면서 결국 퇴각하는 수모를 겪지만..

(전국시대 등에 관한 군기물은 넘쳐나는 일본에 임진왜란 관련
 기록이 희박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명나라까지 
 먹는다고 뻥을 쳤는데 그 문약한 조선조차 못먹은게 쪽팔려서..

 그래도 명나라와 겨뤘다는 기록은 남기고 싶어서 이미 명나라군이
 오기 전에도 태반이 얼어죽고 굶어죽어 퇴각할 핑게만 찾던 상황에
 내려온 명군과 몇차례 교전한 거 가지고 조일전쟁이 아닌 중일전쟁인 양
 부풀리고..  단.. 임진년의 전쟁 주역은 분명 우리와 일본이었지만
 정유재란으로 넘어가면 분하게도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고 우린 시다바리
 인거 맞다..)


문제는 일본의 총 가용병력...
임진년 출정병력 20만에
나고야성 (지금의 나고야 지방말고 규슈북부에 세운 성)에 예비군 10만..
48만명 분의 1년치 군량미 비축.. 뭐 뺑이쳐서 모은거긴 하겠지만
이 정도 물자, 인원 동원력은 조선시대를 통털어 탈탈 뒤져봐도
나오질 않는다.. 궁궐 하나 개축하려고 해도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는
(언로가 발달해서 사간원 등이 엄살? 을 부리는 걸 수도 있지만.. )
조선과 달리 일본 일마들이 세우는 히메지성이니 구마모토성이니 하는
유명한 국보급 성들은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 다이묘들이
자비로 뚝딱지어대는 성들이다.. 한마디로 일본애들은 "돈" 이 있었단 거다.

임진년 출정병력 20만도 그 출신들을 따져보면 그 중 반이 넘는 10만 이상이
규슈에서만 뽑아올린 병력이다. 오사카 넘어 동쪽으로는 거의 차출안하고
지방인 규슈, 시코쿠, 쥬코쿠 같은 변방에서만 뽑아올린게 20만 군이라는 
소리다. 인구 집중지인 간사이, 주부, 간토 지방을 다 합치면
일본내에서 가용한 총 병력은 최소 50만을 상회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일마들이 조선을 지들 위로 인정할리가 없다.
도쿠가와 막부가 조선통신사를 융숭하게 대접한거야
조선이 가장 안 위험한 나라이므로 유일하게 그런 공식 국교를 튼 후
그 사절단을 대접하며 위용을 세워 막부의 위엄을 세우려는 거지
조선을 숭앙해서 그런게 아니다.

유학자들이야 조선유학자들의 가르침이나 문장을 숭상했겠지만,
일본 사회의 주류는 유학자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욘사마가 있다고 일본인이 한국인을 우러러보는게 아니듯이
유학자들에게 글문이나 받으려 줄서는 일본 유학자들이 있었다고
일본이란 나라가 조선 자체를 숭상한게 아니란 이야기다.


다만 멸시도 아니고 그저 그런 이웃.. 쇼군의 권위 세우기 위해
초대하는 손님.. 정도이다가, 그나마 조선통신사들이 기고만장하게 굴고
일본 유학자들도 배울건 어느 정도 뽕뽑았고.. 에도막부 초기의
불안했던 쇼군의 권위도 확고해져서 굳이 손님까지 불러 잔치안해도
되니까 일방적으로 " 통신사 안와도 되염 " 하며 끊어버린거.. 이게 다다..


결국 안타깝게도... 
전근대에는 중국 1위, 한국 2위, 일본 3위였다가
근대에 들어와 이 서열이 일본 1위, 한국 2위, 중국 3위가 됐다...
는건 사실이 아니다..

전 근대에는 중국 1위 외에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주관적으로는 서로 2등..
객관적으로 보면 일본 2위, 조선 3위가 맞다.. 쩝...
억울하면 애 많이 낳던가.. 18세기초에 이미 일본 인구 3천만이다..
단 그게 부양한계였던지 거기서 더 늘지않고 페리제독 흑선올때 까지
100년 이상 정체하다가 그 후 근대를 시작하며 다시 늘어난다.

조선은 19세기 말까지도 통상 1200만 정도로 추산.. 
최대한으로 잡아도 1500만을 못넘긴다.. 

게다가 쵸닌문화 따위로 전근대적 수공업적 방식이나마
상공업의 발달이 상당수준에 이르렀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연암 박지원에 따르면 
중국 변경 마을의 깨진 기왓장 하나까지도 본받아야 할..
수레조차 제대로 못갖춘 거의 순수에 가까운 농업국가... 
뭐 이랬다.. 도조제니 금납화니 하며 근대적 상공업의 맹아가
나타났다고 하지만.. 그래봐야 구한말까지도 통화량이 1000만냥이
넘지 않는.. 즉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향촌경제에서는 여전히 
돈이 아닌 쌀과 베로 거래하는, 화폐경제조차 정착못한 사회였던게 사실..

(단, 이건 미개하거나 열등해서가 아니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이 처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자체가 다르기 때문..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였다고 본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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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FreudeAmLeben님의 댓글의 댓글

FreudeAmLeb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뛰어쓰기나 하시고, 언급을 하시든지 마시든지 하시죠 ^_^

한줄의 짦은 문장이지만, 보는 제눈이 힘드네요..ㅎㅎㅎ

다항식님의 댓글

다항식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금이나 옛날이나 인구는 일본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크지 않아요...
지금 남한 북한 합치면 7천 5백만 정도되는데 일본하고 비교하면  약 4천만명 차이가 나는데....
만약 통일 한국이 오면 인구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물론, 북한에서 말입니다. 경제개발을 거치면서 베이비붐이 있듯이 말이죠...
역사나 국력보다 가장 일본에게서 부러운 점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자기들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기술을 카피하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들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중국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실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현재 일본이 세계 경제 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인구로 과거의 각 나라별 국력을 평가하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한 나라를 지배한 사례도 많으니까요.
나라의 국력은 인구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요소로 간주될 수는 있으나 그 외에도...지정학적 위치나 때로는 뛰어난 통치자를 통해서 국력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밀키초코님의 댓글

밀키초코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결론은,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경제적인 면에서 일본보다 윤택하지 못했다.

이거 맞게 이해한 겁니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은 소고기도 먼저 먹고 배도 일본보다 먼저 만들었는데요?

일본 사람들 밥그릇에 입 대고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으로 떠 먹을 여유가 있었는데요ㅋ

아직도 도기로 유명한 규슈 아리타 지방에서는 조선의 도자기공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그 후예들이 그릇을 만든다구용..

국사만 배우고 세계사 잘 안배우는 현실에서 균형잡힌 역사관을 갖긴 어렵지만

뭐, 어차피 잘 모르는 거면 프라이드 갖고 친절하게 살려고 해욤

FreudeAmLeben님의 댓글의 댓글

FreudeAmLeb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 생각으로는 제가 퍼온 이글이 한쪽에 쏠린 견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각자 글을 어떻게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죠..

또한 기술과 문화또한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도 있을거고, 일본이 발전한 것도 있을거구요..
예를 들어 일본은 네덜란드와 교류가 활발해서, 일찍이 난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많았고, 그 것때문에 일찍히 서양문물을 익혔죠..
나가사키에 가면 우리가 흔히아는 카스테라의 원조격인 카스테라를 접할수가 있답니다.

다른 예로
세종때 조선통신사가 임금에게 보고한 기록을 보게 되었는데

================================================

수차 사용법이 우리나라에는 없어서 데리고 간 김신에게 그 원리를 알아보게 했는데, 일본 수차는 물이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수차가 저절로 돌아가면서 물을 퍼올려 논밭에 물을 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내나 강은 물살이 약하기는 하지만, 일본 것과 같은 수차를 만들어 발로 밟아 물을 퍼 올리면 두레박을 사용하는 것보다 힘이 크게 절감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수차의 모형을 그려 보내니, 그 모형을 본따 수차를 만들어 사용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면포나 미곡으로 물물교환을 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동전을 사용하기 때문에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도 식량을 갖고 다니지 않고 동전만 허리에 차고 길을 떠난다.또, 길가에는 여행자를 위해 잠자고 먹을 수 있는 집을 설치해놓고 여행자를 손님으로 맞고 있다. 여관 주인은 받는 동전의 가치에 따라 사람과 말에 편의를 제공한다. 강과 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강과 내에 배를 잇대어 다리를 만들어놓고 건너다니는 사람에게 돈을 받아 생활하고 다리를 보수하는 비용으로 사용한다. 일본은 토지세부터 다리 통행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전을 사용하는데 익숙해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노고를 할 필요가 없다.

일본 사람들은 남녀노소 구분없이 목욕을 해 항상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집마다 욕실이 있고 마을마다 목욕탕이 있어 주민들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물 끓이는 사람이 호각을 불면 사람들이 동전을 내고 목욕을 한다. 우리도 제생원, 혜민국 등과 같이 의료기관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통교와 지방의 의원 등에 욕실을 설치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고 또 돈을 사용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일본의 상가는 상인들이 각기 자기 상가 처마 아래로 널빤지로 진열대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 물건을 진열해놓아서 먼지가 묻지 않고 손님이 물건을 보고 쉽게 고를 수 있다. 진열된 물건은 신분의 귀천 없이 누구나 살 수 있다. 조선의 시장은 마른 물건이나 젖은 물건을 구별해 진열하지 않고, 생선이나 육류 또는 채소를 모두 흙바닥 위에 두고 팔고 있어, 행인들이 물건 위에 앉기도 하고 물건을 밟기도 한다. 이제부터 종로에서부터 광통교까찌 상점 처마에 보첩을 달고 보첩에 단을 만들어 어느 칸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표시를 해 손님이 쉽게 물건을 보고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세종 실록 11년 12월 3일-

제 생각으로는 확실히 상공업은 일본이 그당시 더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경제구조적으로 한국은 전형적인 농업국이었고,
일본은 농업과 상공업이 결합된 나라였겠죠, 조선처럼 상공업이 경시하는 신분질서도 없어서 더 발전할수도 있었겠구요.

밀키초코님의 댓글의 댓글

밀키초코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모르는 얘기였는데 인터넷상에서라도 읽고 조금이나마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일본 상공업의 발달은 중앙에서 지방의 번주들을 일년에 한번씩 오게 한 법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지방의 번주들이 그 많은 가솔과 짐을 챙겨서 중앙까지 오려면 오는 도중에 여관업을 비롯, 작은 지방의 상공업이 자연히 발달했을 것 같아요.

저는 중국, 일본이라는 큰 나라 사이에서 긴 역사를 살아낸 우리민족의 슬기로움이 보통이 아니라고 봐요. 그래서 한국사람이면서도 놀랍고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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