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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정치 항목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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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waffe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461회 작성일 14-02-24 16:48

본문

쓰신 글 중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고 뭐라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의 몇줄과 그에 이어지는 여러 레퍼런스들에 대한 극히 사적인 생각들이니, 본문과 특별히 상관없다고 보셔도 되겠습니다.
만약 예술과 관련하여 인간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예술 작품을 자신의 내부에 상상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를 확장하는 능력이다. 한나 아렌트는 칸트의 미학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치적 성격을 부여했다.
예술과 정치를 논하는 방식 중에서 예술작품을 경험하는 주체의 내면, 곧 발동한 상상력을 기술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봅니다. 상상력을 공유하는 집단의 출현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도 타당합니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은 감각을 새로이 표현하는 것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감각성의 표출 방식의 차이에서 세대를 구분할 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새롭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유할 집단이 없다면 그러한 새로움은 힘을 얻지 못한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이 말로 서정주의 시를 이해해 보도록 합시다. 서정주의 <문둥이>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이해한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친일 행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둥이>를 읽으면서 문학에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라고 말할 때 이 의미는 무엇을까요? 다른 말로 하면 서정주의 문학은 골방에서 혼자 쓴 글이 아니라 특정한 무리의 지지와 공감을 받은 <문제적인>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지지와 공감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독자들의 상상력이 서정주의 시에서 특정한 상상력을 자극받았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상상력을 자극할 단서들이 서정주의 시에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 우리는 이런 물음을 물어볼 만합니다. 글쓴이는 작가와 작품과 상관없는 독자들의 <자유로운> 연상이 작품의 힘을 보증한다고 파악하는 듯 합니다.
만약 예술과 관련하여 인간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예술 작품을 자신의 내부에 상상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를 확장하는 능력이다. 한나 아렌트는 칸트의 미학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치적 성격을 부여했다.
무언가 더 이야기를 해야 할 대목으로 읽힙니다. 예술작품을 읽고 머리 속에서 그 작품을 다시 떠올리면서 자신을 확장하는 과정을 „정치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인데요. 이에 대해 칸트 미학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독서라는 단서를 다셨습니다. 심미적 능력을 정치적 능력의 일부로 아니면 출발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본문에서 현실과 정치에 무관할 네루다의 시가 남미의 해방 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가정을 들거나, 아니면 친일의 오명 아래 작품의 미적인 성격마저 가치 절하되어야 한다는 비판에 내몰리는 서정주의 시를 인용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이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증폭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작품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서정주가 쓴 한국어의 야함은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감각성의 세계입니다. 그의 작품에 사고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누구도 말라르메에게 당신의 시에는 생각이 있냐고 묻지 않습니다. 말라르메는 언어가 생각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독자적인 힘과 영역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해 보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정주의 한국어를 두고 한가함이나 말장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고생할 때에 당신은 고작해야 말을 가지고 놀았느냐, 당신은 친일로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느냐, 라는 윤리적인 물음에서 그가 해방될 길은 없습니다. 고통의 체험과 기억을 먹고 자란 예술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과 무관한 순전한 예술적 재료에 대한 실험으로 이루어진 예술도 있습니다. 서정주라면 체험보다는 그런 예술적 재료에 대한 환각적인 실험, 어린아이같은 몰두를 특징으로 주장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 서정주의 시를 읽으면서 한국어가 이렇게 아름다울까를 느끼는 것은 미적인 체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술교육은 그러한 미적인 체험에 빠져드는 즐거움 못지 않게, 이성적인 차원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도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미적인 체험을 통해서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과정에는 체험의 현상학적인 분석이 동반합니다. 그러한 체험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통해서 우리는 세계를 배울 뿐 아니라 세계를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곧 언어는 단순히 세계에 대한 인식과 지식을 전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소리, 형상, 색채 등으로 자체로 하나의 의미있는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미적인 체험의 정치적 해석은 내용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언어를 감각적으로 다룰 줄 아는 능력을 배운다면 우리는 어떻게 언어를 조작하는지도 배우게 됩니다. 물론 이것이 반드시 서정주의 시를 배워야 알게 되는 능력은 아닙니다. 서정주의 시는 그 중 하나입니다.
서정주의 시는 그런 과정 중 하나입니다. 서정주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에는 그러한 이해가 빠질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한 탐미성에 결여된 삶에 대한 관찰을 두고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언어를 재발견해게 되는 과정에서 그런 감각적인 언어가 삶의 언어와 섞인다면 우리는 더욱더 감각적으로 현실에 접근하며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을 얻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져봅니다.
서정주의 시를 읽으면서 물론 언어를 관능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 배우지는 않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그려진 악마적인 성격, 꿈틀거리는 본능의 생명력 등이 지닌 의미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기를 잡아먹어야 문둥이의 저주에서 풀려난다는 타부를 건드리는 시적인 상상력은 „꽃처럼 붉은 울음“이 가진 언어적 상상력의 다른 면입니다. 여기서 독자는 두 가지 도발을 접합니다. 하나는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비윤리적인 상상력, 다른 하나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하면서 울 수밖에 없다는 내면의 아픔을 윤리가 아닌 „꽃처럼 붉은“이라는 관능적인 어휘로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언어에는 문둥이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의 시선이 섞여 있지 않습니다. 사회 밖으로 내몰린 범죄자이자 악한의 이미지가 전면에 들어서며, 이들을 향해 관능성을 부여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영웅이라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시의 상상적 공간에서는 아름다움을 도덕적인 교훈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식의 칸트의 고전적인 이해는 전혀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도덕에서 해방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쾌적한 매끈한 균형잡힌 대상의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 시에서는 추함과 악마적인 성격이 우리의 특정한 감각을 자극합니다.  이 시를 두고 아름다움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감각의 해방이란 고전적인 의미의 아름다움을 발견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윤리에서 문학의 어휘를 해방시킨 것은 서정주의 공적입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음은 유럽 문학에서 작가들이 겪어내어야 했던 도덕적 재판, 법적 재판들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문학과 예술은 사회가 허용하는 특정한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들 재판에서 보들레르와 와일드, 데멜은 검열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서정주의 어휘에 나타나는 악마적인 상상력은 아마도 보들레르와 그의 후계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생적인 상상력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당시의 젊은 세대로서 그는 문학의 특정한 경향에 자신의 시로 반발했습니다. 이것은 감각의 반란이며, 감각의 저항입니다. 이 저항이 작품 속에 철저하게 구현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특이한, 제한된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파악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시를 둘러싼 정치와 아름다움/감각적인 것의 관계를 논할 수 있다면, 이는 시인의 정치적인 이력을 끌어들이는 식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시인의 사적인 상상력은 정치적 이력과는 다른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여러 삶의 영역 속에서 그가 수행한 혁명은 언어적인 상상력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삶의 영역에서 그는 그러한 상상력을 현실로 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살아간 정치는 미적인/감각적인 차원의 정치이지, 동시대인의 삶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모순인지 아니면 서로 얽힌 톱니바퀴인지는 그를 연구하는 이들에게서 들어봐야 할 이야기이겠습니다.

양희은이 <아침이슬>을 정치와는 상관없이 불렀음에도 이 노래가 정치적으로 이해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는 음악적 장치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봅니다. 이 노래는 단순히 아침이슬이라는 자연과학적인 사실 또는 목가적인 풍경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왠지 찬송가를 부르는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상록수>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 이제 가노라“라고 말할 때 결연한 느낌은 저만의 것일까요? 세상을 향한 결단을 장엄하게 끝맺는 멜로디에서 사람들은 노래가 전하는 바가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웃지 못하던 시절에 결연함과 장엄함은 삶을 살아가고 견뎌내는 방식이었을 것을 봅니다. 양희은 씨와 김민기 씨가 음악을 유쾌하게 썼다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젊은 비틀즈의 생기발랄함이나, 아바의 노래를 김민기씨가 쓸 수는 없었나 봅니다. 물론 양희은 씨의 목소리가 과연 생기발랄한지도 궁금합니다. 말하자면 곡과 곡을 해석하는 가수 모두 개인의 특정한 (게다가 목소리라는 신체적인)  성향에 제한되어 있고 또 이것은 시대의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다고 봅니다. 김민기씨는 노래의한 뿌리를 민요와 동요에 내리면서,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세계적으로 나타난 민요를 팝아트에 편입시키는 과정과 같은 작업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뿌리는 노동의 현장을 대상으로 다루면서 다른 세계적인 가수들과 다른 작업을 펼치기도 합니다. 1970년대 이후 노동운동에서 김민기의 음악이 가진 의의는 상당합니다.
찬송가라는 틀이 없다면 <아침이슬>이 성공했을까요? 기독교의 역할이 한국 근대사에서는 그리 자랑스러운 역사는 아니지만 함께 노래부름이라는 차원에서 찬송가는 일반 대중 가요가 제공하는 감상의 차원을 벗어난 영역으로 보입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함께 노래 부르는 상황은 교회에서 가능한 상황입니다. 물론 교회의 공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음악이 세속화되는 과정에서 함께 노래부르는 집단이 생겨나는 사회학적인 과정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비틀즈가 방송국에 나와서 공연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에서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아바가 뮤직비디오에 담은 같이 노래부르는 사람들의 장면과 다릅니다. 나중에 비틀즈의 <헤이, 쥬드!>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합창이 나옵니다.  함께 노래 부르는 속에서 즐겁게 하나가 되는 체험을 말하는 듯 합니다. 68년의 분위기가 이러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폭발하는 집단의 광란을 짧은 뮤직 비디오에서 봅니다. 그렇지만 아바의 뮤직 비디오에서 우리는 합창단처럼 연습된 조직된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노래가 시작되면 함께 부르는 이들이 출현하는 현상을 봅니다. 이 집단이 정치적인 집단이 될 것이냐라는 물음도 물어보겠지만, 비틀즈와 아바의 팬 중에서 정치적인 참여에 관심을 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존 레논은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노래를 쓰고 부르기도 했지만 팔리지 않으면서 실패했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아침이슬>은 성공적인 정치 가요로 여겨질 만합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됨의 이상을 실현시켜 준 작품입니다. <아침이슬>은 즐거운 노래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작곡가와 가수의 개인적 독백이 아니라 합창으로 살아남은 몇 개 되지 않는 노래입니다. 존 레논의 <Imagine>은 합창이 아니라 가수의 개인적 독백으로 남은 노래이며, 청중은 함께 부르는 것보다는 감상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은 노래라고 여깁니다. 그렇지만<Imagine>은 질리지 않은 채 들을 수 있는 음악입니다.  다만 장식이 많은 노래이고, 반주도 특정한 악기들을 사용해야 할 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순전히 선율에 따라서만 부르기에는 어려운 노래입니다. 한편 이 노래의 가사는 <아침이슬>의 다소 추상적인, 은유적인 현실에 비교하면 훨씬 자유롭습니다. 아마 이는 미국의 저항운동이 가진 역사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수사학적으로 열어놓은 <나에게는 꿈이 있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유토피아의 세계는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아침이슬>에는 그런 구체적인 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적인 제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는 여전히 체험의 보편성, 곧 같이 부를 수 있는 능력을 갖습니다. 노래마다 가진 기능과 효과가 다르기에 이 노래가 다른 노래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이지 않음, 애매모호함, 그렇지만 인내의 순간과 결연한 결단을 말함은 노래의 특징입니다. 아마 <인내>라는 특정한 덕목과 조심스러운 결연함은 선동적이지 않은 잔잔한 동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나 이제 가노라>라는 세상을 향한 발걸음은 예배라는 제의행사의 틀에서 마지막에 불려지는 노래와 기도의 양상에 닮아 있습니다. 찬송가를 통해서 교회 신도들은 선동적인 행진곡, 고난의 고통스러운 느린 음악, 대강절의 기대감, 한탄, 죽음에 대한 예비, 젊은이의 힘찬 기상, 베토벤과 하이든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유명한 클래식 음악등이 담긴 노래를 모두 연습했습니다. 노래가 제의의 양상을 세속화시킬 수 있다면, 노래는 교회에서 불리면서 하나가 되는 체험을 일상에서도 가능하게 합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됨의 경험은  노래를 들으면서 하나됨을 한발 더 나아간 상태로 보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민요(Volkslied)가 생겨나는 순간을 보기도 합니다. 작곡가와 가수의 특정한 성향이 점점 사라진 채 곡만 살아남는 경우가 바로 민요입니다. <Imagine>은 그러기에는 너무도 존 레논의 구루같은 성격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침이슬>에는 그런 성격이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다소 특징없어 보임, 개성의 부족, 제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이 <아침이슬>의 특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치가요치고는 현실적 관련성도 부족해 보이지만, 그것을 함께 부르도록 만드는 힘을 가졌기에, 오히려 정치가요로 성공한 경우라고 보입니다.
가수는 혼자서 불렀지만 이 노래를 같이 부를 때의 느낌은 단체로 강남스타일을 부르는 것과는 다를 것으로 여겨집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오빤 강남 스타일~“이라고 부르면서 공감할 것인지 궁금하네요. 사이의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며 신나할 것이긴 하지만. 집단의 출현 양상을 보자면 <아침이슬>이 만들어내는 집단과 <강남스타일>이 만들어내는 집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노래를 같이 부름의 의미와 같이 춤을 춤의 의미는 다르지 않을까요?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낫다의 차원이 아니라 공유의 방식에서 차이가 나는 것에 주목해 볼 만합니다. 집단의 상상력은 작품의 성격에 제한되어 있기도 합니다. 사이는 춤을 추기 위해서 음악을 만들었고, 부르기 위한 음악은 아닙니다. 저속한 내용이 재미있기는 하지만, 부르면서 즐거움을 느낄 가사는 아닙니다. 그 음악은 어려운 무용수의 춤을 감상하게 하는 대신에 누구나 적당히 몸을 놀릴 줄 알면 <함께> 즐길 수 있는 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본 못지 않게 <재생산>의 즐거움을 보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아침이슬>에서는 이런 재생산이 거의 불가능한데, 그것은 아무리 기술적으로 당시에 유투브가 있다 하더라도 <아침이슬>이 <강남스타일>과 같은 양으로 재생산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을 물어볼 만합니다.음악이 지향하는 특정한 방향에 따라 재생산의 방식도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노래와 음악은 모두 소비하는 개인들의 집단을 통해서 유통됩니다. <아침이슬>에는 참된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면, <강남스타일>에는 그런 참됨 보다도 <재미>라는 요소가 더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재미는 춤을 통해서 실현되고, 더군다나 기술적으로 <너도 나도 예술가>라는 이상을 공연예술에 해당할 비디오 촬영과 대중을 향한 공개와 공유가 가능해졌으며 자연스러워졌다는 기술적 토대를 통해서 더욱 배가되었습니다.
작품이란 객체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새로 쓰이는 이해를 따르고 있다고 봅니다. 아렌트이든 칸트이든 우리는 이런 경험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를 전하는 „있는 그대로의“ 작품이 아니라 듣는 우리들에게 그것을 따라하면서 자기 식으로 만들어보는 „과정“이라는 이해는 현대 미학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논의입니다. 더욱이 인터넷 매체가 생활의 곳곳에 파고든 현실에서 Psy의 강남스타일은 작품으로서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복제와 재생산 과정에서 유례없는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소비의 양상이 그저 먹어치우는 것, 사용하여 폐품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강남스타일의 소비 양상은 원본에 기생하여 원본을 계속 먹어치우면서 원본을 더욱 살찌게 하는 (원본의 인기를 높이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진보세력이든 보수세력이든, 나이에 상관없이 집단적인 군무를 추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사를 새로 쓰는 과정도 나타났습니다. Psy의 강남스타일을 이렇게 새로 쓰면서 우리는 정치적 행위와는 다른 순전히 심미적인 (감각적인) 즐거움을 발견합니다. 춤을 출 수 있다, 노래 가사를 내 멋대로 다시 쓸 수 있다 등등. 이렇게 새로 발견된 집단의 힘은 경제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보입니다. 곧 원본을 „감상“하지 않고 원본을 „재생산“하면서 우리는 원본을 소비할 뿐더러 유투브라는 공간을 소비했습니다.
공유하는 주체의 힘을 넘어서는 (재)생산하는 주체의 힘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놀라운 현상이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이 원하던) 혁명성을 갖지 못하고 있음에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기술은 해방되었습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하나 들고 촬영하여 바로 유투브에 올리는 시대입니다. <나도 예술가!>의 시대이지요. 초현실주의자들이 그렇게 바라던 행복한 해방의 순간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우리가 <예술가>가 되었나, 아니면 그저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에서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를 실현한 것인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유투브의 투브가 바로 TV를 뜻하는 것에는 채널이라는 말도 한 몫합니다. 그렇지만 기술적 해방의 공간이 유투브라는 말하자면 대기업의 영업전략의 일부라는 것은 기술적 해방을 통한 인간의 해방, 또는 진보의 이상이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노정하는 것일까요? Psy가 해방시킨 그 (재생산하는) 주체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요?  롤랑 바르트가 말한 계속 덧씌워지는 작품이 실현된 마당에 우리는 그러한 잠재력이 향한 방향 하나를 이미 경험했습니다.
그 현상 중 하나는 원본 못지 않게 재생산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본에 대한 그리움이나 원본이 부재함에 대한 아쉬움은 전혀 엿보이지 않습니다. 원본과 닮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원본의 권위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원본은 그저 마음 속에, 몸에 자극을 주는 폭탄과도 같은 힘을 가졌습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원본은 원본의 가치를 변화시켰습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플란더스의 개>는 그토록 원본을 보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소망은 그렸습니다만, 결국 원본 체험을 죽음의 순간에 결부시키는 신비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결말로 끝맺습니다. 원본에 드리워진 장막이 벗겨지는 날 아이는 죽고 맙니다. 이런 설정에 비교해 본다면 원본을 쉽게 접할 수 있음, 게다가 재생산할 수 있음은 정말 다른 시대의 상징입니다.
Psy의 음악을 춤추고 재생산하면서 자신을 유투브에 해방시킨 그 주체들은 과연 자기를 확장하지 않은 것인가 물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를 두고 Psy의 음악에 무슨 혁명의 의지나 해방의 의지가 있느냐 반론할 만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구조는 영락없이 정치철학적인 칸트 미학 해석의 구조에 닮아 있습니다. 자아를 소비하는 개인들의 집단으로 확장했습니다. 그 장치 중 하나는 몰아상태를 유발하는 춤입니다. 집단 군무가 내보이는 나 혼자를 넘어서서 함께 함의 환상이 이 노래의 특징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하더라도 이런 요소가 노래에 내재해 있지 않다면 이 노래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수 없었을 겁니다. 수용자의 상상력이 작품을 전유하는 능력 못지 않게 작품에는 상상력을 자극할 요소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추천4

댓글목록

가아닌양님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Waffel님! Waffel님께서는 저보다 예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시고, 많이 고민해보신 분 이리라 이 글을 보고 짐작해봅니다^^.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다만 Waffel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상상력과 정치라는 이름으로 지시하고 싶었던 것과, 그렇지 않았던 것을 조금 더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Waffel님에 글에 등장하는 '재생산'이라는 단어는 제가 설명하려고 했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며, 새로운 논쟁 주제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나서 제가 고민하기도 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상상력Einbildungskraft과 확장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새로운 힘, 혹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술을 수용하는 평범한 능력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자기 외부의 어떤 것을 상상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능력 자체를요. 하지만 능력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그것이 정치적일지 순수하게 미적 감각과 관련이 있을지는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거기에만 정치적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지요.

그리고 지금 조심스럽게 이야기 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이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을 때, "재생산"이라는형식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배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정치적능력은 수용과 판단까지입니다. 혁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혁명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자신이 모르는 자신이 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아름답다 혹은 정당하다 판단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판단되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 동의를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구조, 혹은 정신의 그 과정이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강남 스타일"을 재생산 하는 사람들과 일베의 예술 행위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복과 재생산으로서 대중예술이 미학적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일베를 이야기했을 때, 혹은 "강남 스타일"을 즐기는 집단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이들은 이것이 지속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보증되리라는 생각을 완전히 배제했다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강남 스타일"이 아름다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지금 내가 즐기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나의 판단과 향유가 타인과 미래를 지시해야만 하는 정치는 여기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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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ffel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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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통한 자아의 확장이라는 대목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님에게서 더욱 자세히 들어봐야 할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문학사회학이나 수용미학에서는 소위 기대지평과 작가 그리고 작품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작품의 성공이란 이것들이 서로 맞물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상상력을 열어주는 작품은 기대지평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때로 기대지평을 넘어서기도 하고 기대지평을 변형시키기도 합니다. 예컨대 서정주가 그런 악한과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를 순수 문학의 모티브로 삼는 것은 당시의 기대지평을 뛰어넘는 "도발" 행위입니다. 그러한 도발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작품이 반드시 "그 시대의" 상상력의 한계 속에서 동의를 받아야 한다거나 거부받아야 한다는 것 이상인 나름의 "초월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이러한 작품이 내재적으로 스스로를 그리고 동시에 집단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느냐라는 물음도 특정한 집단을 통한 동의와 반발 못지 않게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재생산과 혁명의 가능성은 많이 생각해 볼 만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1940년대를 사는 것이 아니라면 기술의 비약적 발달과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예컨대 벤야민이나 언급하신 아렌트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님께서 쓰시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관찰 역시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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