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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it Wissen 지에 실린 한병철 교수 인터뷰 기사를 우리말로 옮긴 글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fatamorgana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5건 조회 4,164회 작성일 14-09-16 14:11

본문

아래 번역글에 이어 번하드님이 소개해 주신 인터뷰 기사를 우리말로 옮긴 글입니다. 우선 글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길지만, 지난 번 글과 마찬가지로 세상과 나, 우리가 처한 모습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 좋았습니다. 부족한 번역이지만, 나누어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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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기사 제목: 한병철 „미안하지만, 이건 사실들입니다.“

한병철 교수는 철학계에서 새로운 스타로 여겨진다. 그는 몇 안되는 문장들로 우리 일상을 떠 받치고 있는 생각의 건물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런 점으로 존경 받기도 하고 공격 받기도 한다. 베를린 철학자 한병철을 니일스 보에잉과 안드레아스 레버르트가 만났다.
한병철 교수가 만남 장소로 플렌츠라우어베르크에 있는 리플링 카페를 제안했다. 이 수줍은 철학자는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피로사회“와 „투명사회“에 관한 책들로 유명세를 탔다. 그는 인터뷰를 꺼려 한다.
약속 시간이 10분 정도 넘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게 하는 건가, 할 무렵 한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내려 왔다. 자리에 앉고는 콜라를 주문했다.

차이트 기자: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죠?

한 교수: 늘 그렇듯이 책상에 앉아 있다가 왔습니다.

차이트 기자: 무슨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한 교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책을 쓰고 있습니다. 보토 쉬트라우스와의 인터뷰를 읽고는 책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당신에게 없는 것은 무엇이죠?“ 라는 질문에 보토 쉬트라우스는 „아름다움이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 이상은 얘기 안했죠. 나에게는 아름다움이 없다, 그리고 저는 알아들었죠. 그리고 나서 아름다움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차이트 기자:  지금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고 계시군요. 그 생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죠?

한 교수: 생각은 비슷한 점들을 인지하는데 있어요. 저는 일어나는 일들 사이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과 예전에 일어난 일 사이에서, 또는 갑자가 비슷한 점들을 인지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자주 있어요.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 관계들을 살핍니다.

차이트 기자: 그런데 그게 아름다움에는 무슨 뜻이 있죠?

한 교수: 오늘날 일어나고 있거나 또는 오늘날 사람들이 좋아하는 물건들 사이에서 관련성을 인지합니다. 예를 들어, 브라질 왁싱 제모, 제프 쿤스의 조각들 그리고 아이폰 사이의 관련성을 말입니다.
차이트 기자: 제모를 스마트폰, 예술가와 비교하신단 말씀인가요?

한 교수: 공통점이야 아주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매끄러움입니다. 매끄러움은 우리의 현재를 특징짓고 있지요. LG 에서 만든 스마트폰 G 플렉스를 아시나요? 이 스마트폰은 아주 특별한 표면 처리가 되어 있는데, 표면에 긁힘이 생기면,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긁힌 자국이 사라지죠. 스스로 치유가 되는 피부를 가진 셈이죠. 거의 살아있는 피부와 같아요. 이 스마트폰은 완전히 매끄러운 표면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어째서 어떤 물건에 긁힌 자국 몇 개가 있다고 뭐가 그리 거슬리는가? 매끄러운 표면을 위해서 이런 노력을 왜 하는거지? 벌써 여기서 매끄러운 스마트폰과 매끄러운 피부와 사랑과의 관련성이 열리는 겁니다.

차이트 기자: 사랑이라구요? 설명해 주셔야 겠는데요.

한 교수:  스마트폰이 가진 이 매끄러운 표면은 상처받을 수 없는, 상처를 회피하는 피부입니다. 사랑에서도 오늘날 우리는 어떤 상처도 피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우리는 상처에 예민하기를 원치 않으며, 상처주는 것과 상처받은 상태 모두 꺼려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투입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많은 투입을 피합니다. 이런 높은 투입이 상처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열정을 피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벌써 너무 많은 상처죠.
더이상 사랑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프랑스말에서는 „tomber amoureux“라고 말하겠지요. 이 떨어짐이 너무 부정적이고, 벌써 피해야 하는 일종의 상처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른 생각과 연결짓습니다.
우리는 „좋아요“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페이스북에는 „싫어요“ 버튼이 없어요. „좋아요“만 있지요. 그리고 „싫어요“가 소통을 정체시킨다면, 이 „좋아요“가 소통을 빠르게 하지요. 상처 또한 소통을 정체시킵니다. 예술 조차도 오늘날 상처주려고 하지 않아요. 제프 쿤의 조각들을 보면 상처가 없고, 파손도 없고, 틈새나 망가진 자리도 없고, 날카로운 모서리도 없고, 이음새도 없어요. 모든게 잘 다듬어져 있고, 갈고 닦아 매끄럽게 되어 있어요. 제프 쿤스의 예술은 매끄러운 표면의 예술이에요. 오늘날에는 좋아함의 예술이 생겨납니다. 이 얘기는 정치에도 연관지을 수 있습니다.

차이트 기자: 매끄러운 정치가 생긴다구요?

한 교수:  오늘날에는 정치 또한 그 어떤 높은 투입도 피합니다.  좋아함의 정치가 생기는 거죠. 좋아함의 정치를 예시하는 정치인이 누가있을까요? 아마 앙겔라 메르켈 총리겠죠. 그래서 그녀가 그리도 사랑받는 겁니다. 확고한 신념도 없고, 비전도 없어 보입니다. 그녀는 길을 쳐다 보고, 기분에 따라 자기 생각을 바꿉니다. 후쿠시마의 원전 재해 후에 갑자기 원자력발전 반대자가 되었지요. 그녀를 두고 뱀장어처럼 매끄럽다고 할 수도 있겠죠. 오늘날 우리는 정말이지 매끄러운 정치를 보고 있는 겁니다.
매끄러운 피부, 매끄러운 예술과 매끄러운 정치 사이에는 흥미로운 관련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조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행동은 비전과 높은 투입을 필요로 합니다. 정치적 행동은 상처를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매끄러운 정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앙겔라 메르켈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정치인들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이들은 그저 체제의 말잘듣는 조력자들일 뿐이지요. 이들은 체제가 멈춰서는 그곳에서 수리를 합니다. 그것도 다른 대안이 없다는 좋은 소리를 들어가면서 말이죠. 그러나 정치는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재와 다를 것이 없어요. 오늘날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독재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영업자입니다. 마르크스의 시대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노동 구조를 갖고 있었죠. 경제는 공장 소유주들과 공장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어떤 공장 노동자도 자영업자는 아니었습니다. 타인에 의한 착취가 일어났었죠. 오늘날에는 자기 착취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자아를 실현한다는 환상 속에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겁니다.

차이트 기자: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은 그 때문에 좌파들의 투쟁용어로도 즐겨 호칭되고 있죠.

한 교수: 그 말은 맞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사회 상황을 아주 잘 칭하고 있습니다. 그건 자유에 대한 착취 문제 때문이지요. 체제는 점점 더 생산력있게 되려고 하고, 그렇게 타인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하는 겁니다. 자기 착취가 더 많은 효능과 더 많은 생산성을 창출하기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이 자유를 구실 삼아 이루어 지고 있어요.

차이트 기자:  한 교수님 분석은 특별히 용기를 북돋게 들리지는 않네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착취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에서도 정치에서도. 상처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상처 줄려고 하지도 않는다.

한 교수: 미안합니다만, 그게 사실이에요.

차이트 기자:  한 개인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행복을 찾을 수 있죠? 우리 이상을 위해 더 참여해야 하나요?

한 교수: 체제가 그걸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몰라요. 내가 내 필요로서 인지하고 있는 필요들도 내 필요들이 아닙니다. 프리막(Primark)이라는 옷 할인점을 예로 들어 보세요. 자기가 사는 도시에 프리막이 없다고 카풀(carpool)을 조직합니다. 그리고 프리막 가게에 와서는 왕창 삽니다. 얼마 전에 신문 기사에서 어떤 여자아이에 관해 써 있었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알렉산더플라츠 C&A옆에 프리막이 입점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기뻐서 소리치며, 프리막이 여기 들어오면 내 삶은 완벽하다고 했답니다. 이 삶이 그녀에게 정말 완벽한 삶인가요? 아니면 소비문화가 만들어 놓은 허상인가요?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자세히 살펴봅시다. 여자아이들은 수백 벌의 옷을 삽니다. 한 벌에 5유로 정도 할 겁니다-그 자체로 까무러칠 일이죠. 이런 옷들을 위해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는 옷 공장 하나가 무너지면 사람들이 죽기 때문입니다. 여자이들은 옷 수백벌을 사고는 좀처럼 입지도 않습니다. 얘네들이 그걸로 무얼 하는지 아세요?

차이트 기자: 유튜브 개인 비디오에 옷들을 자랑하죠.

한 교수: 맞아요. 얘들은 광고를 합니다! 엄청난 양의 비디오를 찍어 올리고 구입한 옷들을 자랑합니다. 유튜브 비디오는 50만회 이상 클릭합니다. 소비자들은 옷을 사거나 다른 물건들을 사지만 입거나 사용하지는 않고 광고를 합니다. 광고는  새로운 소비를 창출합니다. 다시 말해, 상품의 사용과는 분리된 절대적인 소비가 발생한 것입니다. 기업은 소비자들에게 광고를 위임했습니다. 스스로는 광고를 하지 않지요. 이것은  완벽한 체제입니다.

차이트 기자: 이에 대해 저항해야 하나요?

한 교수: 프리막이 와서 내 삶이 완벽해지는데, 뭐하러 저항을 합니까?

차이트 기자: „자유는 지나간 일화가 되리라“ 라고 새 책 „심리정치“에서 쓰셨죠. 왜 그렇습니까?

한 교수: 자유는 강제의 반대 형상입니다. 자기가 처한 줄 모르고 처해진 강제를 자유로 느끼면, 이건 자유의 종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위기에 처한 것이죠. 자유의 위기는 우리가 강제를 자유로 인지하고 있다는데 있어요. 거기에는 저항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저더러 무엇을 하라고 강제한다면, 저는 이 외부로부터의 강제에 대해 저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더러 무엇을 하라고 강제하는 상대가 없다면, 저항은 가능하지 않죠. 때문에 제가 제 책에 표제로 달아 놓은 말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부터 나를 보호해 줘.“ 라는 예술가 제니 홀처의 유명한 문장입니다.

차이트 기자: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지켜야만 한다는 말입니까?

한 교수: 체제가 자유를 공격하면, 저는 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비열하게도 체제는 오늘날 자유를 공격하지 않고, 자유를 도구화합니다. 예를 들어 보죠. 80년대에 인구조사가 있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시위하러 나갔습니다. 어떤 관청에서는 심지어 폭탄까지 터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 의사에 반해 정보를 빼앗아 가려는 국가라는 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리로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많은 개인 정보를 넘겨주고 있어요. 그런데 왜 저항이 없느냐구요? 그 당시와는 반대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유를 공격받고 제한받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거리로 나갔던 것이죠.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우리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합니다.
차이트 기자:  혹시 스마트폰이 우리가 가야할 곳으로 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 아닌가요. 우리는 피해보다는 쓸모를 더 크게 여기고 있습니다.

한 교수: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짜임새는 중세 봉건주의 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농노제도 속에 있는 겁니다. 페이스북과 같은 디지털 봉건 영주들이 우리에게 땅을 주며 말합니다: 경작해라. 공짜로 줄테니. 그리고 우리들은 미친 듯이 받은 땅을 경작합니다. 결국에 봉건 영주들이 와서 수확을 걷어 갑니다. 이것은 소통의 착취입니다. 우리는 서로 소통하면서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봉건영주들은 이 소통에서 이익을 취합니다. 그리고 정보기관은 이들을 감시하지요. 이 체제는 극도로 효능이 좋습니다. 이에 대해 저항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자유를 착취하는 체제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트 기자:  교수님 개인은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한 교수: 저도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상태가 아니면 불안해 집니다. 당연하지요. 저 또한 희생자니까요. 이 모든 디지털 소통 없이는 교수로서 작가로서 직업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메여 있고 꼭 묶여 있습니다.

차이트 기자:  빅 데이터 기술(Big Data Technologien)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한 교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빅 데니터가 감시를 위해서만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람들의 행동을 조종하기 위해서도 쓰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의 행동이 조종되고,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가운데 내리는 결정들이 완전히 조작된다면, 우리의 자유 의지는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빅 데이터는 우리 자유 의지를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이트 기자: 교수님은 빅 데이터가 새로운 계급 사회를 발생시킨다고 쓰셨죠.

한 교수: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는 계급이 없는 사회가 아닙니다. Acxiom 이라는 데이터 회사를 예로 들어 보죠. 이 회사는 사람들을 범주별로 나누어 놓습니다. 마지막 범주는 „waste“-쓰레기 입니다. 액시옴 사는 약 3억 미국 시민, 거의 모든 미국인의 정보를 갖고 다룹니다. 이 회사는 FBI, 아마도 심지어 NSA 보다도 미국민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액시옴 사에는 사람들이 7가지 범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카탈로그에는 이들이 상품처럼 제시되어 있고, 모든 필요에 맞게 구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시장성이 높은 소비자들은 „슈팅스타“라는 그룹인데요. 이들은 26세-45세 나이에, 역동적이고 아침에 조깅하러 일찍 일어나고, 아이들이 없고, 결혼은 했을 수도 있고, 비거니즘적(역자주: 적극적 채식주의) 생활 스타일을 가꾸며, 여행을 즐겨하고 티비 시리즈 사인펠드(Seinfeld)를 봅니다. 이렇게 빅 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 사회를 발생시킵니다.

차이트 기자:그럼 누가 쓰레기 계급에 속하죠?

한 교수: 형편없는 스코어 값을 가진 사람들이죠. 예를 들어 이들은 대출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제레미 번텀의 이상적 감옥 „파놉티쿰“ 옆에 사회학자 지크문트 바우만(Zygmund Bauman)이  명명한 „바놉티쿰“ 이 생겨 납니다. 파놉티쿰은 체제에 갇힌 죄수들을 감시하지만, 바놉티쿰은 체제에서 동떨어졌거나 체제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원치 않는 존재로 확인하고 배제시키는 처분입니다. 전통적인 파놉티쿰은 통제 역할을 하지만, 바놉티쿰은 체제의 안전과 효능에 기여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NSA와 액시콤 사가 공조를 하고 있다는 거에요. 비밀정보국과 시장이 말이죠.

차이트 기자:  쓰레기 계급이 어느 정도의 큰 규모에 다다르면,  통제 사회가 이 계급을 더이상 다룰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한 교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고 부끄러워합니다. 이들은 예를 들어 „하르츠 대상자“ 들입니다. 이들은 늘 두려움에 처해 집니다. 하르츠 대상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는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들은 이 바놉티쿰 안에서 묶여져 있고 두려움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합니다. 저는 하르츠 대상자들을 많이 알고 있어요. 그들은 쓰레기 취급을 당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 중 하나인 독일에서 사람들이 거품 찌꺼기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존엄을 앗아갑니다.  이 사람들은 부끄러워서 당연히 저항하지 않습니다. 사회에 책임을 지우고 따져 묻는 대신 자기 자신을 탓합니다. 이런 계급으로부터는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차이트 기자: 아주 정말 우울한 전망이군요. 어디서 이 모든 것이 끝날까요?

한 교수: 물적 자원 때문에라도 어쨌든 이대로 계속가지는 않습니다. 원유는 50년 이후 정도면 고갈됩니다. 우리는 여기 독일에서 허상 속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는 생산지를 전반적으로 옮겨 버렸어요. 중국에서 우리 컴퓨터, 우리 옷, 우리 휴대전화들이 생산됩니다. 하지만 사막이 점점 북경에 다가가고 있어요. 중국에서는 스모그 때문에 좀처럼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이 노란 먼지 구름이 서울까지 왔던 것을 경험했습니다. 미세 먼지가 폐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어요. 일들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드라마틱합니다. 아직은 한 동안 잘 돌아간다고 해도- 이게 무슨 삶입니까? 아니면 자기 몸에 온갖 센서들을 장착하고 24시간 혈압, 혈당, 체지방을 측정하여 그 정보를 인터넷에 올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걸 자기 추적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벌써 좀비입니다. 이들은 게오르크 뷔히너가 ‚당통의 죽음‘에서 말한 것 처럼, 모르는 힘에 의해 끈으로 조종되는 인형들입니다.

(이 부분에서 리플링 카페에서의 대화가 대화의 흐름이 끊기는 위험이 계속되었다고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계속해서 길거리 악사들-색스폰 연주자, 아코디온 연주자, 가수, 기타리스트-이 우리 탁자로 왔고 자기 악기를 우리 녹음기 가까이 갖다 대고 연주를 했다. 그러나 한병철 교수는 아주 집중하여 얘기를 이어갔고 어떻게 그가 생각을 만들어서 정확히 배열하는지를 그에게서 볼 수 있다고 할 정도 였다. 그런 순간들에 집중력은 온전히 생각에 집중되어 있었지, 그가 생각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있지 않았다. 거리 음악 연주도 그를 혼돈시키지 못했다.)

차이트 기자:  한 교수님.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셨는데, 어떻게 금속공학도 한병철이 철학자이자 강한 체제비판자가 되셨는지요?

한 교수: 저는 기술광입니다. 어렸을 때 열정적으로 라디오나 다른 전자 기기들을 만들고 고치는 것을 좋아했어요. 원래는 전자공학이나 기계공학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금속공학을 전공했죠. 저는 진짜 열정적인 기술자이자 공작자였어요.

차이트 기자: 왜 그만 두셨죠?

한 교수: 화학 실험을 하다 폭발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흉이 남아 있어요. 죽을 뻔 했고 최소한 실명할 뻔 했습니다.

차이트 기자:  어디서 그러셨어요?

한 교수: 서울 우리집에서요. 저는 학생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맞추고, 절단하고 용접했습니다. 제 서랍에는 전선, 계측기, 화학용품 등이 가득 들어 있었죠. 저는 일종의 연금술사 였습니다. 금속공학은 일종의 현대 연금술이잖아요. 그런데  폭발이 있었던 날 부터 그만두었어요.  요즘에도 만들기는 하지만, 전선이나 용접기로는 아니죠. 생각하기도 만들기 입니다. 생각하기는 폭발로 이어질 수 있어요. 생각은 가장 위험한 행위입니다. 아마 원자폭탄보다 더 위험할 걸요.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닌도 말했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라!“

차이트 기자: 교수님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겁니까?

한 교수: 아니오. 저는 지금 현재 놓여진 것을 기술하려고 합니다. 사물들을 꿰뚫어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때문에 저는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보는 것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제가 본 것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제가 쓴 책들은 사람들이 보기 싫은 물건들을 제가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제가 한 분석이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무자비하고, 미쳐있고 부조리한 헙니다.

차이트 기자: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한 교수: 그 질문은 저는 하지 않아요.

차이트 기자:교수님 말씀은, 사람들이 그 질문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인가요?

한 교수: 그건 정말 의미없는 질문입니다. 행복은 제가 노력하는 상황도 아닙니다. 개념을 정의해야 합니다. 기자님은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차이트 기자:  간단하죠. 기꺼이 세상에 있고, 세상에서 편안하다고 느끼고, 세상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잠 잘자고.

한 교수:  마지막 것 부터 시작하죠. 저는 잠 잘 못잡니다. 그저께 철학자 빌헬름 쉬미트와 함께 훌륭한 삶에 대하여 학술회를 음악을 시작했어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죠. 바하는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불면증에 시달리던 어느 백작을 위해 작곡했어요. 저는 청중들에게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대를 찾아서“의 첫 문장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독일어로는 „오랜 시간 일찍 자러 갔다.“  프랑스말로는 „Longtemps je me suis couché de bonne heure."인데, Bonheur 가 행복이라는 뜻이죠. 제대로 번역하면 그러니까 „오랜 시간 행복하게 자러 갔다“ 입니다. 저는 청중들에게 잠을 잘 자는 것이 훌륭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표시라고 말했습니다. 저 스스로는 수면 장애가 있습니다.

차이트 기자: 잠을 못 주무시면 뭐 하세요?

한 교수: 제가 뭐 하느냐구요? 거기 누워 있지요. 제가 기꺼이 세상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 잘못된 세상에서 어떻게 기꺼이 있을 수 있죠? 안되는 일이죠. 그래서 저는 행복하지도 않아요. 이 세상을 자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제게 매우 부조리하게 여겨집니다. 부조리함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하려면, 제 생각에는 허상이 많이 필요해요.

차이트 기자:기뻐하시는 것이 있다면?

한 교수: 무엇에요?

차이트 기자: 아무거나요!

한 교수: 세상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차이트 기자:맛있는 케잌 한 조각에는요?

한 교수: 케잌은 안 먹습니다. 맛있는 음식에는 기뻐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베를린, 독일의 먹거리는 문제입니다. 독일사람들은 훌륭한 음식을 평가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감각을 적대시하는 개신교 영향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시아에서는 음식은 완전히 다른, 아주 높은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독일에서와는 달리 음식에 많은 돈을 쓰기도 하죠.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음식은 숭배이기도 하고, 미학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식재료들의 못믿을 정도의 신선함이 그렇죠! 좋은 냄새를 풍기는 쌀밥도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군요.

차이트 기자:  그건 이제 아주 소량의 행복처럼 들리는 군요. 30년 넘게 독일에 살고 계신데, 어찌 참으셨어요?

한 교수: 참았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네요. 독일에서 기꺼이 살고 있습니다. 독일의 조용함이 좋습니다. 서울에는 조용함이 없지요. 무엇보다 독일말, 독일말이 가진 낱말들도 좋아합니다. 제가 쓴 책을 읽어 보시면 눈치 채실 거에요. 이곳에는 제가 아주 잘 철학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요. 예. 그래도 저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있네요. 음식은 별로지만, 글렌굴드가 연주한 바흐는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자주 몇 시간이고 바흐를 듣습니다. 바흐, 슈베르트의 '겨울여행', 슈만의 '시인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제가 오늘날까지 독일에 남아 있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공부외에 예전에는 노래도 정말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슈만과 슈베르트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노래 수업도 참 많이 들었죠.  피아노 반주에 맞춰 '겨울 여행'을 부르는 것. 그건 정말 좋아요.

차이트 기자: 좋은 것도 있구만요! 교수님은 세상을 나쁘게 말하는데 시간을 보내십니다.

한병철 교수: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강의 시간에 이 모든 문제들을 얘기하기 때문에, 학생들을 절망으로 몰고 갑니다. 지지난 번 수업에서 오늘은 해결책 쪽으로 생각해 보자고 했을 때 몇몇 학생들은 박수를 쳤어요. 드디어! 교수님이 우리를 포기에서 구원하시는구나!
차이트 기자: 얼마나 좋아요. 해결책에 대해서도 우리 교수님과 얘기하고 싶었는데요.

한병철 교수: 해결책 쪽으로 생각해보고자 했지만, 그리고 나서는 다른 문제들만 기술하고 말았어요.

차이트 기자: 아 네. 어떤 문제들이 더 있나요?

한 교수: 오늘날에는 언어가 없어요. 말없음과 어쩔줄 모름만 있어요. 오늘날 언어는 언어를 빼앗기고 있어요. 한 쪽에서는 엄청난 소음, 소통 소음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엄청난 말없음이 있어요. 이 말없음은 침묵과는 달라요. 침묵은 매우 말스러워요. 침묵은 언어가 있습니다. 고요함도 말스럽습니다. 고요함도 언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음과 말없음은 언어가 없어요. 언어가 없는, 시끄러운 소통만 있어요. 이것은 문제입니다. 오늘날 앎 조차도 없고, 정보만 있어요. 앎은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무엇입니다. 앎과 진리는 오늘날 낡아빠진 개념으로 들립니다. 앎은 아주 다른 시간 구조도 갖고 있습니다. 앎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습니다. 정보가 갖고 있는 유한함은 현재, 지금입니다. 앎은 경험에도 기반을 두고 있어요. 장인(Meister)은 앎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딜레탕티즘의 테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차이트 기자: 학문이 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학문은 앎을 만들지 않나요?

한 교수: 학자들은 오늘날 앎의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긍정적인 연구를 합니다. 모든 앎이 지배관계 속에서 일어 납니다. 지배관계, 새로운 처분이 새로운 앎,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냅니다. 앎은 항상 지배 구조 속에 심어져 있습니다. 이 권력의 지배하에 있음을 인지하지 않고, 또 앎의 맥락성을 숙고하지 않은 채로 그냥 긍정적인 연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맥락성에 대한 숙고는 오늘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철학 또한 긍정적인 학문이 됩니다. 이는 사회와 관련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자신에만 관련합니다. 그렇게 학문은 사회 현상에 대해 눈멀게 되는 것이죠.

차이트 기자: 전체 학문을 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한 교수: 많고 적게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오늘날에는 자기 활동에 대한 비판적인 숙고 없이 구글학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정신과학은 자기 활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심사숙고해야하는데, 그러질 않아요.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오늘날 감성연구를 합니다. 이 연구에 참여하는 학자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 하고 있는 이것 왜 하세요? 이들은 자기 활동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차이트 기자: 무엇을 제안하시나요?

한 교수: 정신과학들이 어떤 사회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가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분명해야 합니다. 모든 앎이 체제의 지배구조에 걸쳐 있기 때문이지요. 감성 연구가 오늘날 왜 그토록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마도 오늘날 감성이 생산력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감성은 조종 수단으로 투입됩니다. 감성에 영향을 준다면, 사람들의 행동이 무의식적 토대에서 조종되고 조작될 것입니다.

차이트 기자: 이제 교수님은 음모론자 처럼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지능으로 더 좋은 체제를 만들 수 있을까요?

한 교수: 지능(Itelligenz)는 intel-legere 입니다. 그 사이를 읽는 것, 바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지능은 체제 안에서 구별해 내는 능력입니다. 지능은 새로운 체제도, 새로운 언어도 개발할 수 없습니다. 정신은 지능과는 완전 다른 무엇입니다. 저는 매우 지능이 높은 컴퓨터가 사람의 정신을 복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지능적인 기계를 설계할 수는 있어도 이 기계는 새로운 언어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계는 정신이 없습니다. 어떤 기계도 입력받은 것 이상을 출력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받았던 것 보다 더 내어 놓을 수 있는, 또 받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무엇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생명의 기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생명은 정신입니다. 이 점에서 생명이 기계와 구별됩니다. 하지만 이 생명은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될 때, 모든 것이 알고리즘에 의해 지배될 때 위협받습니다. 레이 커즈바일(Ray Kurzweil)과 같은 포스트휴머니스트를 떠올리는 죽지 않는 기계 인간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 언젠가 불멸성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죠. 그 댓가로 우리는 생명을 잃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바치고서야 불멸성을 이루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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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출처: ZEIT Wissen Nr. 05/2014 - Sep. 2014
우리말 옮김: fatamorgana (베를린리포트) 16.09.14
추천3

댓글목록

이용혁님의 댓글

이용혁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번역문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또 앎의 맥락성 등을 염두하지 않은 채로 그냥 긍정적인 연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성에 대한 염두는 오늘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염두하다' 라는 말은 없습니다. '염두에 두다' 라는 표현을 오해해서 쓰인 표현인 것 같습니다.

anpigone님의 댓글

anpigo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쓰레기 계급 „하르츠 대상자“ 들에 대한 생각을 덧붙힙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숨는 것은 맞기는 맞아요. 과거에 프롤레타리아가 있었다면 이제는 맥주배 나온 몸으로 하루종일 티비 앞에 앉아 소세지와 감자 Chips먹고 티비프로그램 소비하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모든 것에는 역반응이 있는거 같아요. 제 지인중 하나는 멀쩡한 사람인데도 계약직을 얻지 못해서 Zeitarbeit로 항상 바뀌는 직장과 점차 낮아져가는 월급을 감수하면서 죽어라 일했었지요. 그런데 또 다시 잘리고 실업자가 되었는데 이제는 하르츠4 받으면서 조금씩 블랙으로 일하면서 살아요.  그는 그게 더 좋다는 거지요.  그 사람 입장도 상상해보세요.  하루 머나먼  출퇴근길에 초과근무 합쳐서 장장 12시간 이상을 노동때문에 갖다 바치는데도 고작 받는 월급이 1400유로. 그 상황에서는 잘 살수도, 애들도 잘 돌볼 수 없었죠. 그런데 이제는 1100유로 하르츠4, 게다가 블랙으로 일해서 충당한 돈까지 합치니 거의 2000은 번다 이거에요. 
누가 이 사람 탓 할 수 있지요? 그 전처럼 고생해서 돈 없이 가난해라, 애들도 소홀히 해라?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러라고 강요 못할거에요. 제 생각에는 바로 이런 증상이 다른 형식의 "혁명" 아닌가 싶거든요. 강요된 차별을 역이용하는거요.
저는 하르츠4 받는 사람들, 또는 월급으로 집세도 잘 못받는 그런 사람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에라, 그럴바에야 일하지 말아라. 국가로부터 받을거 다 받고 챙길거 다 챙기고,  네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블랙노동해라.

또 한가지 떠오르는데, 요즘은 과거의 자잘한 가게들 대신에 몸집 거대한 쇼핑몰, 백화점등. 이렇게 집중화, Monopolisierung이 되어가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 현상의 그늘 속에서 또 다른 형태가 탄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과거에 없었던 영업 24시간 편의점이 죽죽 생기고 있거든요?  이렇게 어떤 현상에는 역반응, 역이용도 생기는거 같습니다.

  • 추천 1

fatamorgana님의 댓글의 댓글

fatamorgana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anpigone 님. 일정 부분 동감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말씀하신 역반응과 역이용이 있는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 양상과 규모가 미약하여 이들 '쓰레기 계급'의 성원들이 부조리한 체제 전체를 크게 변화시키거나 또는 불안을 떨어내고 출구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모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검은 노동(Schwarzarbeit)'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고, 실제로 세관(Zollamt)에 담당 부서가 있어서 단속의 대상이 됩니다. 겉으로는 '좋다'고 '괜찮다'고 하면서도 불안에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백화점에서 일을 하면서도 해고와 실직에 떨고 있고, 스스로 24시간 편의점이나 쇼핑몰을 운영하면서도 적자 운영과 파산에 떨고 있으며, 터무니 없은 소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검은 노동을 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더 답답한 현실은 돈을 벌어야 살 수 있는 모든 이들이 불안에 떠는 '자유로운' 자영업자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아무도 체제에 항거할 마음의 여유가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자유로운'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사회를 탓하지 말고 그 시간에 자신을 한 번 더 돌아 보며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 가야 한다"는 긍정적 세계관을 강요 받습니다.

anpigone님의 댓글

anpigo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뱀장어처럼 매끄럽다= aalglatt 
제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자면, 하르츠4받는 사람에게 블랙으로 일하라고 권하는 자체가 뱀장어처럼 매끄러운  권고가 아니라는거에요. 사실 아무도 이 "하르츠4 대상자"들에게 말해줄 만한 대책이 하나도 없는게 현실입니다. 서점에 대량 판매되는 "긍정적 마인드, 오늘 이순간을 살아라" 어쩌구 하는 주접들가지고 뭐가 해결되는게 아니거든요. 그들은 실제로 잉여, 불필요한 거품인겁니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먹여서 살려두는 것 뿐. 그런데 이들을 위하는 대책도 모두 "매끄러운" 범주내에서 머물고 있는 대책도 아닌 대책들 뿐이죠.  그런데 받을거 다 받고 블랙노동하라는 것과 같은 "역이용"은 사실상 모두가 할 수 있는 제안이기도 하고, 또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건만 약속이나 한듯이 모두가 터부시 합니다.  왜냐. 매끄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교수님께서 쓰신 "매끄럽다"는 표현은 사회체제에 대한 Conformity와 순응을 전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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