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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을 생각하며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948회 작성일 15-06-28 20:34

본문



"오늘날 우리가 맡은 일은,다만 자기 스스로 건설만이 있을 뿐이니,결코 남을 파괴하려는 데 있지 아니 하도다.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 집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려는 것이지,결코 옛날 원한이나 일시적인 감정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고 배척하려 함이 아니로다."

  이 글은, 지금부터 96년전 일본제국의 무단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던 대한 백성들이 식민지의 굴레를 떨쳐버리기 위해 일어선 독립선언서의 한 부분으로서,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과 기초작업에 참여한 한용운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의 역사인식과 세계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두운 과거를 탓하며 원한,증오,배척의 감정을 갖고 항거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오로지 엄숙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자기 집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밝고 환한 빛을 향해 왼쪽 오른쪽을 돌보지 않고,힘차게 나아갈 따름이다"
라는 선언이 엄혹한 식민통치의 현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 만이 갖고 있는 한철학의 세계관과 불교화엄학의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 당시 민족지도자들의 사유체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드높은 기상을 가리켜 뒷날 정인보 선생은 "우리 민족의 의(義)요,생명이요,교훈"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삼일독립만세 대행진은 우리나라 역사 줄기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종산(宗山)이기도 하지만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깊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六堂) 최남선. 그는 지금 우리 민족사회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

우리 민족의 義와 생명과 교훈을 간결하게 추려내어 글로 나타낼 수 있었던 한국학의 태두(泰斗) 최남선은 1928년 10월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에 촉탁으로 들어가고 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됨으로써 하루 아침에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만년에는 일제 군부에 동원되어 학병입대를 권유하는 연설을 하고 다녀 '친일문학가' 또는 '역사의식 없는 근대화 맹신주의자'라는 폄하를 받아 왔다.
  그러나 최남선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상황을 다시 조명해보면 이런 폄하는 흑백을 명쾌하게 가리는 단순논리의 폭행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일으키게 한다.
  최남선은 춘원 이광수,벽초 홍명희와 더불어 당시 '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커어졌던 특출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잡지인 『소년』을 18세 때에 발행해 신문학(新文學)의 깃발을 올렸고, 한국의 역사,지리,철학,사상의 지식을 망라하는 『조선상식문답집』을 출판해 무지한 민중을 계몽하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최남선, 그 누구보다도 <한사상>과 <한철학>을 탐구하는 데에 몰두했고,  국토를 사랑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최남선이 아무 생각이나 까닭없이 하루아침에 변절의 길을 걸어갔을 리가 있겠는가.

  "동시대인으로부터 너무 앞서 있었기에,그의 주위는 사면이 모두 처녀지였기에,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신기한 것이었기에, 시대가 그에게「무슨 하나」가  되는 것보다는 「모든 무엇」이 되기를 요구하였기에 그는 문학가 학자 사상가 사업가 저널리스트 정치가가 되었고, 또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닌 인물이 되고 말았다"는 유진오의 평가처럼 최남선은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역사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공헌한 바가 없는 책상물림 선비들의 심심풀이 글장난에 말려들어 "친일문학가" 또는 "역사의식이 없는 변절자"라는 희롱과 오욕을 받아야 할 인물이 결코 아니다.
 
  최남선은 1890년 4월 26일 경성부 삼각정(현재 서울 을지로 2가)에서 한약무역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04년 조정의 고관자제들을 중심으로 50명을 선발하는 국비일본유학생 시험에 응시해 최연소 최고득점의 영광을 안고 일본유학길에 올랐으나,  유학동기생들인 고관대작 자제들의 몰지각한 언행과 방탕한 생활이 일본조야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데 대한 괴로움과 울분을 참지 못해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을 했다. 그러나 17세때에 황성신문에 투고한 반일성격의 글이 문제가 되어 구속까지 당했다가 풀려나온 최남선은 다시 일본으로 가 와세다대학 고등사범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다. 역사를 배워 후학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조선정신을 북돋우고 국토애를 고취해 국권회복의 기틀을 만들겠다는 것이 최남선의 꿈이었다.
  이때 와세다대학 학생회에서는 연례적으로 열리는 모의국회의 의제를,당시 대한제국 광무황제(고종)를  모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왕 내조에 관한 건」으로 결정했다. 최남선은 와세다대학에 재학중이던 70여명 조선유학생들의 앞장을 서서 의제 철회와 도쿄 발행 일간지에 사과문을 낼 것을 요구하는 집단항의를 주도하며 자진퇴학을 했다.
  이무렵 17세의 최남선은 2년 연상인 홍명희의 소개로 15세의 이광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 뜻이 통해 귀국하여 근대잡지인 「소년」을 발행,계몽운동을 펴기로 했다.
  이때 만난 세사람이 바로 20세기 전반기 한국사회를 움직여 간 이른바 "조선의 3대 천재"라고 일컬어졌던 사람들이다. 가장 연장자인 홍명희는 대하장편소설 「임꺽정」을 쓴 사회주의자로서 북한의 부수상을 지냈고, 춘원 이광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한 이래 「유정」「무명」「흙」「사랑」등 계몽주의적 소설들을 잇달아 발표한 우리나라 국문학의 거봉(巨峰).
  일본유학 석달 만에 학업을 중단한 최남선은 그후로 어떤 정규교육도 받지 않았다. 그의 다방면에 걸친 방대하고 해박한 지식은 거의 독학의 열매였다.
위당 정인보와 더불어 육당 최남선에게 한국실학과 불교철학의 보고(寶庫)를 열어준 사람은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발원하여 추사 김정희와 백파스님에게로 이어진 실학과 한국 불교철학을 전수받은 석전(碩顚) 박한영이라는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야의 국학자요 불교의 선사 禪師이다.  미당(未堂) 서정주의 회고에 의하면, 실로 위당과 육당의 학문은 그들이 스승으로 모신 박한영 스님을 통해 우리 강산을 사랑하는 다산의 실학과 우리의 정신과 사상을 근원으로 하는 초의의 불교철학이 조화를 이룬 특출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조선사 편찬'을 서두르며 우리 민족의 만주사(滿洲史)를 없애려는 일제 사학자들과 대립해 '불함문화론'을 발표하면서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 인류사적 가치가 돋보이고 있는 우리 학문 '국학(國學)'의 근본체계를 정립한 태두(泰斗) 최남선. 누가 이 학문적 공헌을 능가할 업적이 있어 최남선을 규탄할 자격이 있는가. 그는 추앙받아야 마땅한 민족의 대학자이다. ◈
추천2

댓글목록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님. 유익한 생각거리를 남겨 주는 글 우선 감사합니다. 동시에 한겨레님께서 연속적으로 올려 주시는 글들이 내포하고 있는 관념들을 다시 한 번 지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의 계몽주의자들은 그들의 학식에 바탕을 둔 수려한 문장력으로 한국인들을 '위대한 민족' 도그마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선언은 현실에 빗대어 전혀 실천적이지 못해 외려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엄혹한 식민통치 하에서 우리 민족이 도대체 무슨 수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인지요?

한철학의 세계관과 불교화엄학의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 그토록 장엄한데 어째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자본주의적 욕망 앞에서는 그처럼 철저히 무너질 수 밖에 없었는지요?

있지도 않은 실학의 계보를 다산-김정희-백파로 잇는 행위는 학문적으로 지나치게 무책임한 억지 아닌지요?

이미 폐기되어야 할 낡은 사상을 마치 아직도 이어가야 할 우리 겨레의 정신적 고갱이인 것 처럼 주장하시는 것은, 단지 한겨레님 개인적 사변의 틀 안에서 벌이시는 학문적 유희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보지는 않으신지요? 

제 주변에 보기 드문 어른으로 한겨레님을 존경하고 싶은데, 늘 이런 기본적인 질문들에 가로막혀 님께 한 걸음도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후학이 선대를 마음것 孝 할 수 있게 길을 터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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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 있지도 않은 실학의 계보를 다산-김정희-백파로 잇는 행위는 학문적으로 지나치게 무책임한 억지 아닌지요? " 라고 하는 친시님의 의문에 대한 답으로 아래의 글을 올립니다.

한국학(韓國學)의 큰 스승 석전 박한영 스님

                -한국불교 근대화의 문을 연 석전 스님-
          -100년 전에 치세의 근본이 소통에 있음을 역설-

일제의 폭력과 수탈로 나라와 겨레가 신음하며 칠흑같은 어둠 속을 헤매던 그 때, 그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겨레를 빛이 보이는 미래로 이끌었던 세 분의 스님이 계셨다. 바로 만해스님과 용성스님, 그리고 석전스님이십니다.
해인사주지 이회광과 불교신문, 동국대학의 권상로같은 자들은 아예 친일의 길로 나섰고, 만공,한암,효봉 등의 스님들은 여전히 산중에서 참선수행에만 정진하고 있을 때에, 이 세분 스님은 시정(市井)에 뛰어들어, 어둠 속에서 범부중생들과 더불어 함께 씨름하며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세 분 스님 가운데 한 분이신 박한영(朴漢永 : 1870~1948)스님은 선암사의 금봉스님, 화엄사의 진응스님과 더불어 근세 한국불교의 3대 강백(講伯: 요즈음 말로 유명 강사 )으로 손꼽히는 어른으로서, 선사로 널리 알려진 만암스님,청담스님,운허스님,경보스님 등이 모두 이 석전스님의 제자입니다. 오늘날의 불자들이 큰스님으로 우러러 보는 백양사의 서옹스님과 성륜사의 청화스님은 만암스님의 제자이니, 석전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스님들이십니다.
 

우리나라 불교 근대화를 이끌었던 선각자이자 석학이었던 석전 스님(왼쪽 사진)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학계에도 많은 제자들을 남기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미당 서정주입니다. 이들이 근세 조선의 석학삼당(碩學三堂)으로 불릴 만큼 박학다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승인 석전스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대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육당 최남선은 석전스님의 한시(漢詩)를 모은 <석전시초 石顚詩抄> 발문에서, “석전사(師)를 만나매,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위당 정인보도 <석전산인 소전 石顚山人 小傳>에서, “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를 가나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지 화제는 고갈될 줄 몰랐다.” 고 술회했습니다.

항일학생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울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퇴학당하고 방황하던 자신을 중앙불교전문학교 제자로 받아들여준 석전스님에 대해 미당 서정주는 “나의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고 부르며 평생 존경의 마음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석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정인보, 오세창, 이동영, 이능화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며, 만암, 청담, 운허, 운성, 운기, 남곡, 경보 스님 등 출가자와 이광수,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모윤숙, 김동리, 조종현, 김영수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모두 석전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석전 스님은 1870년 9월14일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스님은 아홉 살 되던 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열여섯 살에 이미 서당의 학동들을 가르칠 만큼 배움이 깊었습니다.
1886년 17세에 출가해 승려로서 배워야 할 바를 익히기 시작한 스님은 1890년 장성 백양사 운문암 김환응 스님 문하에서, 그리고 1892년 당대 최고 강백으로 손꼽히던 선암사 김경운 스님에게 경학을 배우고, 건봉사와 명주사에서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구암사에서 설유처명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아 당호를 영호로 정했습니다. 이때 석전 또는 석전산인이라는 법호를 설유처명 스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법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지기지우로 교유하던 백파스님에게 “훗날 법손 가운데 큰 도리를 깨쳐 나라의 기둥감이 될 재목이 나올 터이니 이 호를 전하라!”고 부탁하며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그의 글 <질마재 신화>에서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 보면 추사가 글을 지어 쓴 백파의 비석에는 대기대용 (大機大用)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부탁한 법호 '석전 石顚'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써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야! 단수 참 높구나! 하고 탄복한 것이겠지요.“
이 법호가 백파스님의 법손인 설유처명에게 전해졌다가 마침내 박한영 스님에게 전해진 것이니, 선운사 백파문중에서는 박한영 스님을, 추사가 생전에 말한 “큰 도리를 깨우쳐 나라의 기둥이 될 재목”으로 인정한 셈입니다.

석전 스님은 평생 4만 권에 가까운 도서를 구해 읽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선운사에 보존되어 있는 스님의 장서에는, 우리나라 고서를 비롯하여 중국 및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들이 있는데, 특히 중국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담사동이 1896년에 저술하여, 1899년 일본과 중국에서 처음 출간한 <인학 仁學>을, 스님께서 1913년 번역해서 해동불보에 연재한 일은 스님의 독서량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게 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문-안 세 후보가 모두 “국민과의 소통”을 역설하기 이전 이미 100년 전에, <인학>을 번역 연재하면서, 치세(治世)의 근본이 “인(仁)과 통(通)”이라고 역설하며 “불인(不仁)과 불통(不通)한 것은 제거해야 한다”고 하신, 스님의 천리안(千里眼)이 실로 놀랍습니다.

석전 스님은 옛어른들의 서책을 그 누구보다 많이 읽으셨지만, “옛 것이 훌륭하고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옛사람의 학문을 숭상하는 것은 오늘을 낮추는 실마리가 되며, 오늘날 뛰어나고 생명을 이롭게 해주는 말과 글이 옛 사람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 역시 잘 받들어야 함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석전 스님은, 기미년 독립만세행진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1919년 4월23일 인천 만국공원 집회에서 발족한 <한성임시정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만큼 항일독립정신이 강했습니다.
석전스님은 1908년부터 만해(卍海), 금파(琴巴)스님 등과 불교개혁에 나섰으며, 1910년 만해, 성월(惺月), 진응(震應), 금봉(錦峯)스님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해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제총독부가 일본의 조동종을 끌어들여 불교를 왜색화 하기 위해 진행했던 ‘불교통합정책’에 반대하며 진행했던 것입니다.
스님은 또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3년, 일본이 강요한 천장절 기념 학교행사에서 연단에 올라, “아아! 그런디, 오늘이 바로 일본천황 생일이여. 그러니 잘들 쉬여”라고 한마디 하고는 바로 내려와 학생들이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등 수시로 반일감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석전 스님은 단행본 형식의 역서와 저술 9권을 비롯해 100여 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을 남겼습니다. 이런 스님의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방대한 독서와 글쓰기는 당대 한국불교와 겨레 현실의 어려움을 헤치고 미래로 나가기 위하여, 온 몸과 정신의 역량을 쏟아 붓는 열정과 염원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기일회(一期一會)의 한 평생을 한국 불교와 겨레 사랑으로 일관했던 석전 스님은 1945년 일흔여섯 살에 이르러 주지 매곡 스님에게 “나 여기 세상 뜨려고 왔네”라며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불교 초대 교정(지금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됐음에도 한 번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은 스님은 1948년 4월8일 세속의 나이 일흔아홉 살, 법랍 예순한 살에 내장사에서 신병 하나 없이 좌선 입정하여 육신을 벗으셨습니다.



<사진 설명: 1941년 3월 13일 유교법회 직후 찍은 기념사진. 앉아 있는 스님들 중 왼쪽에서 세번째가 석전스님이다. 석전스님 오른쪽 옆은 만공스님. 유교(遺敎)법회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열린 것으로 만공스님, 한암스님, 석상스님, 서응스님, 동산스님, 청담스님, 석주스님 등 당대의 고승 30여명이 참여해 진행한 것이었다.

석전스님은 당대의 고승(高僧)으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대 지식인들이 큰스승으로 섬길 만큼, 동-서양의 학문에도 통달하셨고, 특히 우리 한겨레의 뿌리를 밝히는 한국학(韓國學)의 태두(泰斗)라고 불리었습니다. 스님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선생의 학문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을 깊이 탐구했고, 이를 현장체험하기 위해 1924년 7월부터 제주도, 금강산, 호남지방 등의 명찰을 수차례 답사했고, 특히 한철학과 한국학의 본향인 백두산에는 일곱 번이나 올랐습니다. 스님의 백두산행에 수행한 최남선은 이 때 스님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의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후일 최남선이 고육지책으로 일제의 <조선사 편수작업>에 참여하는 한편으로는 일제의 조선사 편수 목적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을 쓰게 된 바탕이 바로 석전 스님의 백두산 등정 강설입니다.
다음은 스님께서 백두산에 올라 읊으신 한시(漢詩)입니다.

曉日天池浴 효일천지욕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해
虹霓斷復連 홍예단복연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光風吹瀨急 광풍취뢰급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蕩破西峯煙 탕파서봉연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 구나.

아래는 스님께서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탐사하며 남해안 일대를 답사할 때 다도해의 노을을 바라보며 읊으신 詩입니다.

多島亭亭映日斜 다도정정영일사 다도해 곳곳마다 노을 빛 쏟아지니
姻雲錯落似奇花 인운착락사기화 저문 구름 붉게 피어 한 송이 꽃처럼 지고
波光岸影隨帆轉 파광안영수범전 파도 빛과 뭍 그림자 돛배 따라 흐르니
身世蒼凉等落霞 신세창량등락하 이 내 몸 쓸쓸하여 저녁노을과 한가지네

다음은 석전 스님이 정읍 내장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께 못 보던 과자를 드렸습니다.
“그 과자 맛이 아주 좋구나.”
“그건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를 드셨으니 계를 범하셨지요. 바로 그 점에 대한 법문을 듣고 싶어 스님께 드린 겁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오징어를 먹인 것은 너희들이니 계를 범한 쪽은 바로 너희들이니라.”
“그래도 잡수신 분은 스님 아니십니까?”
“허허, 어른이 갓난아이에게 뜨거운 인두를 덥석 쥐어주면 과연 누구의 잘못인고, 순진무구한 갓난아이의 잘못인고, 아니면 어른의 잘못인고?”

이같이 석전 스님은 쉬운 말로 지계(持戒)의 뜻을 일깨웠습니다. 지계는 깊은 사려를 포함합니다. 사려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계율은 건물의 기초와 같습니다.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계율을 지키는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몸에 두른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늙음을 허무하다고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을 깊게 모르는 입에서나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 번지듯 햇살이 창에 들듯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법, 밝고 따스하게 스미는 죽음의 이치를 알고 나면 늙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지,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로움만 남기에, 오히려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육당 최남선이 노년에 이른 스승 석전 스님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하는 스님의 생사관(生死觀)이 제 것이 되기를 발원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쌔앰님의 댓글

쌔앰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님의 소중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진정한 평화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글로 인해서 후손들 한 명이라도 더 국학의 정신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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