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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화의 노선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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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품마렵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0건 조회 908회 작성일 15-08-12 21:46

본문

'공부하라' 는 초자아는 초중고의 성장기를 지나면서 형성되는데, 그렇게 형성된 초자아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존속한다. 친근한 표현을 위해 '공부하라-초자아' 라고 일단 이름을 붙였지만, 이 초자아의 명령이 반드시 공부하라는 명령의 형태로 나타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대개의 경우에는 공부다. 하지만 '봉사활동 실적 쌓기' 라든가 '해외 파견활동 경험 쌓기' 라든가 '인턴 활동 경력 쌓기' 같은 것들을 해야 한다는 생각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저번의 글에서도 썼듯, 공부하라는 말도 결국은 나중에 번듯한 사회인이 되라고, 가능하면 더 잘난 (위에 서는) 놈이 되라고 시키는 것이니, 그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꼭 공부가 아니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초자아를 가진 주체들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징검다리 삼아 우리는 "자기계발하는 주체" 라는 익숙하면서도 다방면으로의 활용성이 좋은 개념으로 넘어올 수 있다. 그렇다. 공부하라는 명령을 좀더 포괄적인 말로 바꾸자면 자기계발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공부하라-초자아' 를 가진 주체들을 자기계발의 주체, 자기계발하는 주체 정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기계발은 어떻게 '명령' 이 되는 걸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제한 상태에서는, 개인들은 자기가 자기계발을 하고싶으면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을 뿐, 하기 싫은 자기계발을 억지로 하라고 누구한테서 강요받을 일은 없다. 그러나 '공부하라' 는 초자아는, 초자아가 늘 그렇듯 강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자기계발이라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경제 안에서 각 개인들이 자신의 값어치를 높이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계발을 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될 것 같지만,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로 제시되기 때문에 –안 하면 두들겨 맞을 수도 있는 그런 강력한 의무– 사람들의 초자아가 될 수 있다.

이런 초자아가 유난히 강고하게 형성될 수 있는 무슨 이유들이 있을텐데, 첫 번재로 '효' 이데올로기가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난 번 댓글에서 노엘리님이 언급한 바와 같이, 효 이데올로기는 조선시대 때 부터 위로부터 강력하게 권장되어 한국 사회의 주요 문화적 특징 중 하나로 완전히 뿌리내렸다. 효 이데올로기의 적극적인 전파는 수백 년 동안이나 이루어 진 일이다. 효를 강조하는 컨텐츠는 조선시대에만 생산된 게 아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아동용 도서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효 이데올로기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언뜻 생경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핵심적으로는 결국 부모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에 대한 요구이다. 일반적으로 효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공경이나 사랑은 매우 막연한 개념이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매우 아름다운 –이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언급할 것임– 말 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다양한 구체적인 사안들이 이 말들로 포섭될 수 있다. 예를들어 부모가 자녀의 입신양명을 간절히 원할 때 이것을 이루어주는 것이 부모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고 해 보자. 뭔가 아름답게 들린다. 그러나 그 구조만을 건조하게 뜯어보면 틀림없이 자녀가 부모의 욕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효라는 것을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야 한다 (좀더 딱딱하지만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부모의 욕망에 복무해야 한다')" 는 명령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부모에 대한 사랑" 이라는 식으로 에둘러 막연하게 이야기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풍경들이 만들어진다.

별로 오래되지 않은 한 CF 에서, 어느 나이 많은 어머니는 횟집 (인가, 아무튼 무슨 식당 같은 거) 을 운영하고 있다. 횟집의 간판에는 자식의 이름이 쓰여 있다. 광고가 전달하는 메세지는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갖은 고생을 마다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스펙타클을 통해 표현되는 '부모 마음' 이라는 것은 이중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흔히 동물들의 모성애와도 비교되곤 하는 내리사랑이다. 다른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부모의 욕망 –자식이 잘나가기를 바라는– 이다. 이런 욕망은 물론 부모가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숨겨진 동기로부터 동력을 얻는다. 간판에 자식의 이름을 써 넣은 풍경은, 정작 그 간판을 단 사람들은 그런 동기를 갖지 않은 특이한 사람들일지 몰라도, 그와같은 정황을 시각화 해 준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어느 프로그램이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한 가정의 사례가 소개된 테레비 프로가 있었다. 거기에 나오는 어린 소년은 벌레를 굉장히 좋아해서 많은 관련 서적을 섭렵하고, 개별 서적에 오류가 있으면 그것들을 고쳐 메모해 두기도 하고, 상당히 훌륭한 수준의 곤충 표본을 만들기도 하는 등 곤충에 아주 푹 빠져 있다. 어머니는 아이가 교과 공부를 소홀히 하는 데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고, 프로그램에서는 부모를 아동 전문 상담가에게 데려간다. 프로그램 안에서 드러나는 아이 엄마의 생각은 이런 것이다. 만약 이 아이가 곤충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상당한 수준이어서 나중에 이걸로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냥 놔 두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집안 지저분하게 하는 잡동사니들을 다 내다 버리고 공부를 시키고 싶다고. 상담사가 질문지 조사 결과 현재 부모가 아이에게 칭찬이나 격려 같은 것들을 해 주는 정도가 매우 낮다고 말하자 아이 엄마는 약간 충격을 받은 것 처럼 보인다. 첫 번째 장면,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부모 마음' 의 두 번째 차원이 드러나고, 자식을 충분히 지지해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가벼운 충격을 받으며 자식을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아파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에서는 '부모 마음' 의 첫 번째 차원이 드러난다.

일전에 서울 초등학생들의 사교육 실태를 조사한 어느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밤 10 시, 11 시 까지 학원을 전전하는 초등학생들의 모습과, 이들의 사고가 이미 친구들을 경쟁상대로 인식하는 형태로 굳어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자녀들을 '뒷바라지' 하느라고 잠을 아껴 가면서 잘 가르친다는 학원 정보를 모으고, 하루 종일 자녀를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태워주고 다니는 기사 역할을 하고, 머리 좋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음식을 찾아다 구해 먹이는 엄마들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런 풍경 속에서 부모 마음의 두 가지 차원은 서로 잘 구분되지 않고 뒤섞이며, 이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많은 경우 첫 번째 차원이 주는 아름다운 느낌으로 두 번째 차원을 잘 보이지 않게 덮어씌워버린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라는 보자기는 효 이데올로기 속에서 효행을 실천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데에도 활용된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부모 마음에 응당 보답해야 –부모의 욕망에 복무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그 존재 방식에 있어서 뭔가 기만적인 데가 있다. 이런 아름다움은 경치가 아름답다거나 미녀의 얼굴이 예쁘다거나 하는 생리적 감각으로 다가오는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그런 것보다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당신, 아름답습니다" 라거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돕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라거나 "전신의 끔찍한 화상을 이겨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이 아름답다" 라거나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그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하는 식의 아름다움과 분류를 같이하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말하자면 법(초자아의 율법)을 훌륭하게 수행한 것을 '아름답다' 고 표현하는,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인 것인데, 이 아름다움은 다시 초자아의 법을 따라야 할 빌미로써 사용되니, 일종의 순환고리인 셈이다.

두 번째 이유는 경제적 조건이다. 앞선 글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내용이지만, 한국사회는 비록 무너지는 중이라고 할지라도 상당히 분명한 두 개의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정규직, 괜찮은 소득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고원의 위와 비정규직, 낮은 임금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고원의 아래로. 치열한 자기계발의 목적은 고원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 조건은 부모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앞서 언급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또 그 프로그램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경우에도 어머니들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으니까..." 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따라간다 라는 것은 고원 위로 올라가기 위한 경쟁에서 그들이 경쟁 상대로 삼는 사람들에 비해 적어도 처지지 않는 수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다 같이 서로를 "따라가" 려고 기를 쓰면 당연히 점점 모두의 템포가 빨라지고 다들 점점 더 숨이 차게 된다.

한국의 경우 '낮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높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강도높은 노동에 헥헥댄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심지어 아직 일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비슷하다. 다만 낮은 곳의 사람들은 돈을 못 벌고 더 낮은 직업 안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 X 같은 근로조건 속에서 일한다. X 같은 근로조건이란 흔히 고용자가 고용인을 동등한 위치의 계약 상대로 대하기 보다는 노예 취급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은 비교적 법과 규율이 잘 지켜지는 편인 대기업이나 공기업 보다 중소기업에서, 그리고 기업 내부의 계층구조에서 하위에 속하는 곳에서 더 심하다. 어느 나라나 이런 특성이 어느 정도는 있게 마련이겠지만, 독일에 비하면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갑의 횡포가 더 심하다는 데에는 대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아주 가까운 예로는 아직 현지어를 잘 하지 못하는 워홀러나 유학생을 착취하는 한인 식당 같은 경우가 있다.

이런 조력(?) 조건 속에서 갖추어진 공부하라-초자아는 한국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중, 선진 산업 국가에서 보편화되어있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주체에게 고립적인 압력을 가하게 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개인들은 행위와 행위의 책임을 짊어지는 단위가 된다. 공식적으로 노예라는 계급이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계급은 원래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류상의 딱지붙이기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상징적' 계급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상징적 계급은 실체가 없지만 현실에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노예들은 노예 계급이기 때문에 노예로 살아야 한다. 이 때 노예들은 외부로부터 노예라는 상징적인 계급(신분)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노예인 데 대해 책임이 없으며, 또한 시키는 일을 해야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와 같이 상징적 계급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인이라면 이들은 각자 자신의 결정에 따라 행위하고, 그 행위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주체는 초자아의 압력을 온전히 혼자 짊어지게 된다. 공부하라는 명령 속에서 십대를 보내고 나서 마주한 세상은 책임을 지는 명령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자유주의의 세계이다. 누군가가 이러저러하게 살아라, 라고 말한다면 원래는 그 명령자가 명령한 것들을 수행했을 때 따르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예를들어 장군이 군대에 공격을 명했을 때, 공격 실패의 책임은 명령을 따른 사병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명령을 내린 장군에게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세계는 "하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무슨 결과가 되든 그 결과도 니가 알아서 감당하고" 라는 식이다. (이런 경향은 점점 더 넓은 영역으로, 이를테면 학교로도 파고들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학교에서 체벌은 사라지게 된다. 적어도 90년대 까지는 공부가 두들겨 패 가면서 시키는 일이었다면, 자유주의화가 확장되면 학교에서도 공부는 하든가 말든가의 형태로 제시되며, 공부를 해서 생기는 결과든 안 해서 생기는 결과든 그 결과는 학생 개개인이 알아서 짊어질 일이 된다. 이 이야기는 저번 글에서 가아닌양님이 이미 댓글로 해 주셨다. 이런 자유주의화 경향이 교사들의 권위 붕괴와 관련이 있음은 당연지사. 약간 번외의 이야기지만, 나는 권위의 붕괴와 학생들의 폭주 –가령 교사를 폭행하는 학생의 좀 더 빈번한 등장 등– 도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권위란 책임을 대신 짊어지는데서 그 정당성을 얻는다. 예를들어 행위를 명하든 어떤 행위를 금하든 간에 그런 규범을 내려주는 이가 그 규범에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짊어지게 되는데, 이런 것이 사라지면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노출되는 아이들이 적절한 초자아 구조를 갖지 못하게 되어 적절한 사회화를 달성하는 데 실패하게 될 위험이 생겨난다. 공부하라-초자아의 형성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만, 초자아 형성이 아예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버리면 이것 또한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학생 인권이라든가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 같은 것만 강조하는 자유주의적인 교육정치 세력에 맞서 체벌 부활과 교권 신장을 외치는 보수주의 교육정치 세력은 그들이 이러한 구조적인 정황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나름의 정당성을 가진다.)

그 고립의 상태에서 쌓인 불만이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갈래로 새어나온다.

초자아의 명령에 따르는 주체는 초자아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명령을 수행하느라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자기 자신을 전복하는 데 사용하는 대신 자신이 따르고 있는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것 처럼 보이는 이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화하곤 한다. 자기 안에서 친일파, 부정부패자로 분류된 정부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는 이들은 그들과 생각을 같이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갖고, 역으로 이들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 종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그들대로 적개심을 갖고, 어떤 이들은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적은 사회적 의무를 지고 다양한 혜택만 누리고 있다고 생각해 그들을 적대하고...

세상을 '정상화' 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이들이 있어서 이들을 박멸하거나 혹은 두들겨 패 조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증오에만 부채질을 할 뿐 생산적인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 생각은 실천 불가능한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실천 되어서도 안 되고.

본격적으로 이전 글에서 이어지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넘어가 보자.

친일파에 민족주의의 적이고 더군다나 부패의 온상이라는 새누리당 중심의 세력을 척결하면 그것 만으로 세상이 좋아질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새누리당에 대한 적대 하나 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이 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 인데, 이들이 집권한다고 해서 고원 위와 고원 아래로 갈라진 한국의 경제 구조적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노무현이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비리는 어디에나 있다. 물론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경계되어야 하는 것이며, 민주당이라고 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걸리지만 않는 다면 이런 짓 저런 짓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친일파의 후손이 여전히 정재계에 남아있어서 현재의 자유주의적인 경쟁 환경이 조성된 것도 아니다. 미국과 연을 끊고 남북 통일을 이룬다고 그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 땅도 남한화 될 뿐이다. (물론 북한화는 애초에 선택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지도자의 우상화와 하나의 통치세력의 절대화, 거기에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 -바로 죽이거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말려 죽이거나- 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냉소주의도 도움이 되는 태도는 아니다. 성공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성공 (고원 위로 올라가기, 혹은 고원 위에서 살아남기) 을 목표삼아 구성된 공부하라-초자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만든다. 소위 '좋은 학군' 이라 불리는 지역의 초등학생들이 서로를 노골적으로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회의하는' 사람은 냉소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헉헉대며 승진 또는 생존을 위해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붇는 삶에 회의를 느껴 일을 그만둔, 혹은 그만두려 하는 사람을 두고 "지가 능력이 딸려서 잘나가지 못하는 걸 그럴사한 방식으로 포장하는 것 뿐" 이라고 말한다든가, 외모지상주의적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놓고 "못생긴 것들이 열폭(열등감 폭발)한다" 고 말한다든가, 종합적으로는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에 대한 비판과 그런 흐름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한 회의 같은 것들을 "니가 못난 것에 대한 열폭" 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도록 이끌 뿐이다.

여성혐오와 무임승차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다. 여성혐오도 의무를 적게 지고 혜택을 많이 누리려 하는 태도에 대한 증오라는 점에서 무임승차에 대한 혐오와 궤를 같이한다. 이런 종류의 혐오는 "나는 이만큼 '당했는데' 너는 왜 안 당하냐?" 라는 식의 불만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노예근성이다. 내가 다섯 대 맞았을 때 옆엣 놈이 네 대 맞으면 화를 내고 그래서 옆엣 놈도 한 대 더 맞으면 그제야 만족하는 그런 태도다. 이런 건 당연히 서로의 삶을 더 힘들게 할 뿐이다. 올바른 방향은 사회 구성원들이 정말로 짊어져야 하는 의무를 정확히 합의하고, 그것들 적절한 방식으로 나누어 지기 위한 합의와 그 합의의 과정에서 요청되는 기존의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타당성있는 비판이지, 혐오가 아니다.

애국주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국을 외치는 이들은 우선 애국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한국이라는 기호에 대한 숭앙일 뿐이라면 그게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데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애국심을 통해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건 다른 나라에 의해 핍박받고 있을 때 애국심을 통해 사람들이 단결해 괴롭히는 이를 몰아내는 경우 뿐이다. 사람들이 다들 애국가만 들으면 눈물이 줄줄 흐르는 애국자(?)가 된다고 해서 공부하라-초자아가 사라지거나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삶의 고난들을 온전히 홀로 짊어져야만 하는 자유주의적 세계가 변화하는 건 아니다.

반공주의(한국의 경우 정확히 말하자면 반북한주의다. 한국에서 반공주의는 엄밀히 말해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애초에 반공주의자들 중에 공산주의에 대해 충분히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현재 공산주의 사상이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지도 않다. 한국에서의 반공주의는 적대국가에 대해 만들어진 적개심일 뿐이다.)도 그렇다. 반공주의는 애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제한적으로만 의미가 있다. 예를들어 북한이 지금 남한에 핵을 날리려고 준비 중이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북으로 전해주는 스파이가 있다고 한다면, 이 스파이는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색출되어야 한다. 그런 경우는 하지만 흔치 않고, 많은 경우 반공주의는 민주화된 사회 속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동원될 뿐이다. 그들이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군민의 단결을 해쳐 북한이 쳐들어올 빈틈을 만든다는 식이다.

나는 이런 것들보다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회의, 각자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에 대한 회의를 좀더 많이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탓을 하자는 게 아니다. '내 탓이오' 라는 태도는 분명 기본적으로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게 내 탓이다' 라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회의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내탓이오~ 노래만 부르고 다른 소리는 하지 마" 라고 말한다면 그건 부당한 억압이다.

베를린리포트 유학일기 게시판이나 유학문답 게시판을 보면 종종 방황하는 이들에게 짐짓 근엄하게 대략 "제대로 각오를 해라" 라든가 "그 정도 힘든 것도 못 견딜 거라면 왜 시작했느냐" 라거나 하는 식으로 꾸짖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초자아의 현신이 된 분들이다. 이런 소리를 들은 어린 사람들은 주눅이 들어 "그렇죠, 제가 열심히 해야 되는 건데..." 라며 자신을 책망한다. 왜 주눅드는가? 이미 공부하라-자기계발 초자아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달리지 않으면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 방황하는 동안 '이렇게 잉여짓 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라는 자기책망에 빠져든다.

죄책감을 조장하는 것은 베를린리포트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덮어놓고 "그딴 식으로 할거면 공부하지 마라" 라고 윽박지르는 인터넷 강의 강사 라든지.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잉여정서는 이런 죄책감을 유머러스하게 소화해 내는 한 방식이다.

죄책감은 초자아와 공모관계에 있다. 죄책감은 자신이 갖고있는 초자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초자아의 명령에 잠시 소홀해 질 수 있게 해 주는 방편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초자아의 명령을 수행하기를 소홀히 하면서 (즉, 휴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초자아로부터 버림받지 않게 해 주는, 또는 버림받는 데 대한 불안을 진정시켜 주는 것이 죄책감이고, 이것은 초자아의 명령을 수행하기를 소홀히 하면서도 초자아를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있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이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대신 죄책감을 잠시 무시하고 좀더 회의하는 거다.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인지, 지금 정말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위해 달리고 있는 건 맞는지... 또 뭔가 힘들다면 그 힘듦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생각해 보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살아가려면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 각자는 모두 혼자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애국 같은 빌미로 자신이 몸을 의탁할 곳을 찾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어떤 결속력 있는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주고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고 보살펴주는, 내가 실패하더라도 도와주고 일으켜주는 그런 집단은 실제로는 없다. 어떤 초자아적 명령도 책임은 지지 않는다. 공부하라-초자아 역시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이들이 나중에 불평을 할 때 돌아오는 목소리는 "니가 열심히 안 해서"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종류의 초자아든, 초자아의 명령에 복종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초자아는 무책임하다. 정직한 건달이라면 "니가 이번 건 뛰어주고 빵살고 나오면 나중에 형이 니 인생 책임져 줄게" 라고 말하고 그 약속을 지킬지도 모른다. (물론 정직한 건달이 실제로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초자아는 그렇지 않다. 초자아는 단지 명령과 요구를 퍼부어대기만 할 뿐,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없을까? 초자아는 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의 정신 작용일 뿐,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어떤 '올바른' 정치화의 길을 제시해 주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럴 역량도 없다. 단지 내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공부하라-초자아와 개개인을 고독하게 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맞물려진 세상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들이 어떤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지 스케치하고, 과거의 정치적 움직임 중 대표적이라 할만 한 것과 대조해 현재에는 어떤 정치화가 이루어지고 또 그것들이 왜 헛발질에 가깝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고, 이런 막막함 속에서 길을 찾아나가려면 우선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에 대해 좀더 깊이 회의하는 과정이 필요한 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제시해 보고자 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만약 뭔가 인생이 힘들고, 자주 우울하고, 답답하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근본적인 차원에서 깊이 고민해 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빨리 목표를 정해라, 꿈을 찾아라, 노력해라, 이런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범람하고 있다. 이에대한 수요도 많다. 이것들은 불안에 대한 좋은 임시 처방이 되기 때문이다. 초자아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해도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다는 생각에 달리기를 멈춰버리면 주체에게는 불안이 찾아온다. 초자아를 따르기를 게을리하여 생기는 버림받음에 대한 불안은 죄책감으로 즉각적으로 변환되어 소화되지만, 근본적인 방향 상실에서 오는 불안은 쉽게 해소되지 못한다. 꿈을 찾고, 그것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할 각오를 해야 하고, 쓰러져도 또다시 도전해야 하지 않냐는 질타의 채찍은 잠시 불안을 사라지게 해 줄 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결국은 깊은 회의의 수풀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나는 이런 이들에게 어떤 재촉이나 채근을 하기 보다는 괜찮다고 말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여유가 한국 사회에는 부족해 보인다. 초등학생 때 부터 이십대에 이르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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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anpigone님의 댓글

anpigo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하품마렵다님, 이 글을 읽으니 많은 부분 저의 성장기와 일치하여서 지나칠 수가 없네요. 아마도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빨리 목표를 정해라, 꿈을 찾아라, 노력해라"

어휴, 저만 귀에 박히게 들은 소리가 아닌거 같아 위안이 됩니다. ㅋ

저는 어릴 적에 "꿈"이 없어서 무척 괴로웠답니다. 저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었어요. 엄마는 자꾸 저보러 "너는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 하나도 없이 갖출거 다 갖춘 아이가 왜 도대체 야심이 없고 꿈도 없느냐!"면서 다그치고 속터져 하시는데, 참... 그런 말 듣는 저 스스로도 답답하고 괴로운게 저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있지요? 그런데 당시 저의 또래들은 저와는 다르게 다들 자신의 "꿈"을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내가 뭔가 잘못되었고 부족하구나!" 그리고 무슨 혜성처럼 "나의 꿈"이란게 뾰옹~ 나타나 주었으면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꿈이란건 항상 장래직업=돈벌이와 연관된 질문이었어요. 당시 여러 사진들과 그림을 수집하기 좋아했던 제가 가령 "A와 B를 한 1천장 더 모으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면, 누가 그런걸 "꿈"이라고 인정해주었을까요. 돈도 안되고 명예도 가져다 주지 않는 그런 쓰레기(?) 수집을요.

저는 현재 "돈벌이"와 "제가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직장생활=돈벌이를 하는데 이건 저의 꿈과 아무 상관없어요. 이게 굳이 싫어하는 노동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슈퍼마켓에 가는 행위와 비슷한 차원의 의미랄까요. 먹으려면 식품을 사야하니까 슈퍼마켓에 가기는 가야하고, 습관때문에 항상 다니는 마켓에 자꾸 가게 되고... 하지만 사실 마켓을 바꿔도 크게 개의치 않을 그런. 

너무 평범하고 소박한 삶이다 보니 말하기가 좀 망설여지기는 하네요. 저는 여러분께 “저처럼 이렇게 사세요!” 말씀드리는게 아닙니다. 혹시 저와 같은 고민이 있으신 분 계실까,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여기에 고백하는거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하품마렵다님 글의 맨 끝부분처럼 "괜찮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아참, 저 어릴 적에 진짜 듣기 싫었던 소리는 엄마가 “아무개를 봐라, 그 애는 이렇고 저렇고…” 하는 말씀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다들 내 꿈은 뭐다!하고 외칠 수 있었던 애들이었어요.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 애들 중에 그때 거창하게 주장했던 꿈을 실제로 성취한 아이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어릴적 그 애들과 비교당하며 제가 받았던 수모에 그들의 현재 모습을 겹쳐보면 진짜진짜 그때 그렇게 수모받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 추천 1

sonnenblumen님의 댓글

sonnenblum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드디어 3탄!
잘 읽었어요, 하품마렵다님~

안피고네님, 저도 어릴 적에 딱히 원하는 '꿈'이란 게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빨리 목표를 정해라, 꿈을 찾아라, 노력해라'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해라' 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내일이 시험인데 제가 친구집에 놀러가서 친구가 놀라면서 시험 공부해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있고 중학교 1학년 때도 시험 기간에 동네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한 친구가 놀라기도 했었어요.
저는 공부가 뭔지 몰랐었고 수업 시간에 상상하느라 수업 내용 모르고 지나치기도 했어요. 예를 들면 산수에서 마이너스 표시가 들어가는 계산법 있잖아요. 저는 그것을 수업 시간에 안듣고 딴 생각해서 모르는 상태였는데 시험에 나오는 문제를 여러 차례 틀려가면서 마이너스 앞에 마이너스가 오면 플러스가 되어서 계산한다는 것을 터득했었어요. 처음 수업 시간에 한 번 제대로 잘 들었다면 시험에서 여러 번 틀리고 점수 깍이는 일이 없었겠죠?^^
하여간 저는 공부라는 것을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딱히 목표라는 것도 없었어요.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연합고사를 치른다는 것을 남들은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아니면 그 전에부터 알고 있었는데 저는 중3이 되어서야 알았어요. 제가 장녀여서 그랬는지, 오빠나 언니가 있었더라면 그런 정보들을 나도 일찌감치 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당시에 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구체적 '꿈'이란 것, 없었어요. 학급에서 자기 소개를 할 때 나의 장래 희망은 신사임당과 같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은 있으나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싶다거나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고3이 되어서야 했던 것 같아요.

하품마렵다님, 저는 비교적 '공부하라-초자아'와 상관없이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님께서 거론하시는 효 이데올로기에서 저 또한 예외는 아닌 것 같아요. 부모의 욕망을 제가 대신 충족시키는 것. 제 아버지나 어머니께서는 한 번도 제게 '공부하라'를 강요하신 적이 없지만 어머니는 당신께서 이루지 못한 욕망이 있었고 그것이 은연 중 제게 투시되었고 어머니의 그 여자라는 이유로 이루지 못한 욕망 때문에 결국 저는 독일까지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들 셋을 제치고 부모의 덕을 제일 많이 본 딸이라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정작 집에서는 '공부하라-초자아'가 발현될 필요가 없었다 할지라도 학교에서는 상황이 많이 달랐지요. 중3때 진로를 결정하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부모님의 체면을 생각하며 인문계를 가야겠다고 결정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 또한 제가 우리 나라의 효 이데올로기 내에서 성장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바로 이 '공부하라-초자아'가 아주 강력해진 것 같은데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교장 선생님의 인사말 중 한마디, '대학에 가지 않을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걸어나가라' 는 학부형들을 안도(?)케 했었죠. 전교생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명문대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진학하기 위해 고3 정규 과정을 1, 2 학년 때 선행 학습하고 고3부터는 그야말로 대입 시험을 준비하는 기계가 되었던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3년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안피고네님의 '꿈' 이야기로 돌아가서, 저는 안피고네님과는 다르게 '돈벌이'와 '좋아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살고 있어요. 저는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늦게나마 알게 되었고 지난 몇 년 동안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라고 생각해요. 주변에서는 제가 번듯한 직장이 없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제 동생은 지금도 저더러 공무원 시험 준비하라고 해요ㅋㅋ)도 있지만 저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더라도 제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리고 '꿈' 또는 '장래 희망'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몇 년 전에 찾았어요(많이 늦었나요?^^)
예전에 KBS에서 방영하던 '글로벌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에서 소프라노 김청자씨의 이야기를 다뤘었는데, 김청자씨가 사별하고 케냐에서 음악 교육 활동을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아... 나도 저런 것 잘 할 수 있을텐데...' 했었죠. 그래서 제가 환갑을 넘긴 후에, 그 때에도 오지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오지에 가서 저의 재능을 기부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이것이 제가 앞으로 하려는 일 중의 하나^^

안피고네님께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셔서 저도 제 이야기를 조금 풀게 되었네요.

하품마렵다님, '괜찮다'라고 말하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말에 백퍼 공감하면서 좋은 글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 추천 1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세기에는,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IMF 전에는, 복종하면 그 복종의 댓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모종의 믿음이 있었지요. 자식이 부모에 복종하면, 사원이 회사에 복종하면, 후배가 선배에게 복종하면, 그리하여 시스템에 제대로 종속되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사는 것 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 관계가 깨졌습니다.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죠.

하품님의 글을 읽고 나서 한국 사회의 본질적 비극을 다시 한 번 추려보게 됩니다. 

20세기 사람들이 모조리 다 움켜 쥐고 그들 시대에 형성한 초자아로 21세기의 현신이 되어 젊은이들에게 명령한다. 어떤 명령자는 교양이 넘치는가 하면 어떤이는 무식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을 조종하는 초자아는 같다. 물론 그들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윗글이 설파하는 것 처럼 초자아란 애초에 무언가를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초자아에 지배당한 명령자들은, 이미 자기 먹고 살 것은 다 갖춰 놓은 자들이라 여유가 있다. 그래서 단정적이다. 그 단정이 틀렸더라도 상관없다. 자기 식량창고가 두둑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20세기 대한민국을 건설한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해 주니까.

이대로 지속된다면,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되겠죠.
'종의 생존'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고 자기 뱃속을 채우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된 좀비의 나라. 이미 권력자 부류는 좀비 바이러스에 완전히 감염된 것 같고요.

공들여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추천 2

하품마렵다님의 댓글

하품마렵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댓글들 모두 잘 읽어 보았습니다. 구독에 감사드립니다. (읽기만 하신 분들도 포함하여) 몇몇 분들께는 그래도 나름의 가치가 있었던 글인 듯 하여 보람을 느낍니다.

쓰던 도중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혹은 나도 미처 몰랐던 내 생각의 허점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풀어내기 위해 몇 시간씩, 혹은 하루이틀 씩 쉬기도 하고 많은 분량을 지우고 새로 쓰기도 하면서 글쓰기를 통한 자습 효과도 얻었답니다. ㅎㅎ

  • 추천 1

sonnenblumen님의 댓글의 댓글

sonnenblum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렇죠? 이렇게 긴 글을 쉽게 써낼 수는 없겠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듬고 또 다듬어서 이런 훌륭한 글이 나오겠죠.

앞으로도 공들여 글을 써주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읽을게요~

초롱님의 댓글

초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글 감사드려요. 제게도 무척 유익했어요. 안피고네 님도 그렇게 쓰셨지만 전 독일 20대 청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아요.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 추천 1

가아닌양님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초자아”라는 정신분석학의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고전적 모델을 따른다면, 초자아는 욕구를 좌절시키는 제 3항의 개입에 기인한다. “초자아”의 등장을 위해서는 욕구의 대상인 “어머니”와 그 욕구의 성취를 방해하는 “아버지가”가 모두 필요하다. “초자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데올로기 분석을 위해 “초자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다른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만약 한국의 고전적 “효”를 이러한 “초자아” 모델을 통해 분석해낸다면, 우리는 이 모델 아래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이중적 모델로 이해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효”모델을 아버지에 대한 복종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무조건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관계에서의 일탈에 대한 가능성(그것에 대한 어머니의 이해 가능성)을 동반한다. 이 관계 안에서 자식은 아버지의 모델을 일탈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일탈(혹은 타자)이 항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최근의 부모자식간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 전통적인 “효” 개념의 작동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러한 제 3항이 개입될 가능성이 사라져버린 관계이다. 주체는 “타자(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기본 심리적 메커니즘은 제 3항(금지)의 개입 가능성 없이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초자아” 모델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만한 현대적 특징은 부모의 욕망과 자식의 욕망이 어긋날 가능성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머니(욕망에 대한 이해, 혹은 욕망해야 할 대상)와 아버지(금지)의 이중 모델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욕망과 금지의 이중적 구조가 발생할 가능성이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금지의 상실’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교육모델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교육모델은 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을 이해한다. 그리고 기존의 윤리를 아이에게 명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는 이러한 자유주의 교육모델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점점 모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혹은 사회적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 추천 1

anpigone님의 댓글

anpigo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가아닌양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올리신 심리분석을 보면 남성위주인거 같네요. 

-“초자아”의 등장을 위해서는 욕구의 대상인 “어머니”와 그 욕구의 성취를 방해하는 “아버지가”가 모두 필요하다.-

여기에서 여성의 경우는 반대겠죠?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해도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가아닌양님의 댓글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우선 질문이 정확히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서 두 가지로 구분해서 답변을 드립니다.
1. 정신분석학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꼭 남자와 여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2.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생물학이 아닌 정신분석의 메카니즘 아래서) 분화가 나타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좀더 복잡하고 논란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고요. 제 기억으로는 아마 초기에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에게서 부모의 역할이 반대로 나타난다는 생각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욕망과 금지의 구조가 여자 아이에게도 동일한 방식의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더 수월한 설명인 것 같습니다. 제가 댓글로 언급한 것도 단순히 욕망과 금지의 이중 구조를 설명한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수준까지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에게 동일하게 작동하는 구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만약 아이의 모든 필요들이 미리 처리된다면, 즉 아이가 배고픔이나 축축함이나 추위나 그 밖의 여하한 다른 불편함을 느낄 기회를 갖기도 전에 보호자가 먹여 주고, 갈아 주고, 온도를 잘 맞춰 주는 등등을 한다면, 아이가 왜 수고스럽게 말(법, 금지 – 가아닌양 주)을 배우려 하겠는가? –라캉의 주체, 브루스 핑크“

Noelie님의 댓글

Noel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잘 읽었어요. 늘 고맙습니다.

소위 서양이 이만큼이라도 되는 사회를 이루어 놓고 살게 된 과정을 살펴봅시다. 19세기는 유럽, 특히 독일에서의 교육의 세기라고 합니다. 19 초반, 전 유럽에 미친 프랑스 혁명 ㅡ 물론 이 혁명이 얼마나 성공했는가, 아렌트처럼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라는 시각은 일단 접어 두고 ㅡ 정신의 영향만은 아무도 거부하지 못합니다. 이때부터 교육에 계몽사상이, 그리고 인본주의가 자리잡게 됩니다.

교욱에서의 계몽은 철학에서 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당대에 일반적이었던 (지금 우리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민들의 사고가 종교, 전통, 사회의 규범, 통념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에서 벗어나,  각 개인이 지성을 가진 사고의 주체로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을 양성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보았습니다. 칸트가 말한 "selbstverschuldeten Unmündigkeit" 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250년 전부터 현대사회까지 밀고 당기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온갖 법률과 제도로 각 시민이 Unmündigkeit에서 벗어나, 사고하는 주체가 되도록 애쓴사회가 지금의 서구 민주사회 입니다.

우리 한국은 영국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영국이 200년 만에 한 것을 20년만에 이루었다고,  역사에 없는 대단한 업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20년 만에 이룬것이란  공업화와 선진 민주제도를 받아들여 실행한 것이지, 의식의 개혁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서양에서 지난 250년간 피흘리며 싸워서 얻은 그 과정이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제 생각은, 우리도 결코 공짜로 손쉽게 단기간에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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