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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동포사회(파독근로자)특징.독일과 인연 있는 사람들께 권독(선경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공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2,810회 작성일 16-07-18 00:00

본문

  독일 동포사회의 특징과 파독근로자들의 국가 사회발전 특별공헌
                                                                                1부  07 11.2015  Frankfurt 선경석
교포신문 20주년 기념 동포사회의 특징과 미래 심포지움에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파독 근로자 국가 사회 발전 특별 공헌 과정= 
-근로자 파독 52주년을 맞이하여 조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부분과 장기 거주하면서 이루어낸 성과물들이 세계화 시대에 국가적 편익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다음의 내용들은 파독 50주년 2013년10월23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파독근로자 국가적 예우, 어떻게 할 것인가”토론회에서 발표했던 내용들이며 당시 국내 정치 지형으로 기록하지 못했던 두 가지 중요 부분과 토론회 이후 정부로부터 받아낸 두 가지를 추가하였습니다. 

  1964년 파독 1년이 되던 해 수출 1억 달러가 달성 되고 파독 근로자들의 송금한 외화가 들어오게 됩니다. 
  독일에서 송금된 외화는 외화 가득률(稼得率) 100% 입니다. 즉 수출하여 모든 비용(기술이전료.원자재. 설비. 차관이자. 임금. 수송. 통신. 보험. 홍보 등.)을 제외한 순 이익금을 말 합니다.

  당시 1억 달라 수출의 내용을 살펴보면 수출 품목의 대부분이 원자재를 외국에서 들여와 가공하여 수출하는 하청 무역으로서 경제 전문가들은 수출하여 벌어드린 외화 가득률은 5%-15% 를 넘지 못했다 합니다. 즉 1만 원 짜리 물건을 팔았을 때 이익이 5백 원에서 1천5백 원을 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출액 대비 예상 수익 비률을 중간 10% 예상해서 환산했습니다. )

  -파독 근로자들에 대하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조사 발표는 1965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근로자들이 송금한 금액은 총 1억153 만 달라, 년 평균 1천만 달러 이며 당시 보고서(1부 123쪽 표10)발표는 1965년-1967년 기간에 우리나라 총 수출액 대비 파독근로자 송금 액 내용을 발표하면서 2% 에 달한다. 라 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로서는 파독 근로자들의 송금 액이 당시 국내 경제에 어떤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1990년까지 수출대비 수입에서 이익을 내지 못한 상황으로 파독근로자 송금액을 수출액에 대비하는 옷지 못할, 당시의 국가적 애처러움의 단면을 가슴에 묻고 가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비교 평가는 잘못된 것이며 당국자들은 총 수출액 5억 달러 대비 1천만 달러 송금이라는 비교 통계의 오류를 범하면서  우리 파독 근로자들의 외화 송금을 과소 평가하고 있습니다.

  통계상 총 수출액 5억 달러 라는 발표를 들으면 우리 손에 들어왔다고 하는 착각을 국민들이 하도록 하는 통계의 속임수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위원회가 그 명성에 걸맞게 제대로 된 평가를 하겠다는 성의가 조금만 있었다면, 이런 상투적이고 모호한 비교 평가 대신  당시 수출액과 외화 가득률을 연계하여 실질 외화가득액 (實質外貨稼得額)을 산출하여 파독 근로자 송금 액과 비교 평가해야 합니다.  그  답이  다음 도표 중앙 부분 “ 비율 % „  입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자료 준비 과정에서 “파독 근로자들의 송금 자료가  노동부에 1965년-1975년 것만 보관 되어 있고, 전 후의 것은 없다는 발표에 그 자료를  액면대로 발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근로자 파독 기간 부분적 년도 별 수출입 현황과 근로자 송금 액 비율.
                              (단위 백만 달러. 단 독일 송금액 단위 만 달러수출액에서 예상 수익액 10%)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발표수출액 대비독일송금액)

년도      수출 액      예상수익    독일      수익 예상  수출액    GNP      수입액    수출입손익
                              수출액      송금액    대비 독일  대비독일  (단위$)
                            대비 10%  (단위$)  송금액%    송금액%
1957      2천2백          2백만                                                          4억4천        -4억2천
1963      8천6백          8백                                                  100      5억6천        -4억7천
1964  1억2천만      1천2백                                                  103      4억4백        -2억8천
1965  1억7천5백    1천7백      273만      16 %        1.6%      105      4억6천        -2억8천
1966  2억5천만      2천5백      477만      23 %        1,9%      125      7억1천        -4억6천
1967  3억2천만      3천2백      579만      18 %        1,8%      142      9억9천        -6억7천
1968  4억5천5백    4천5백      241만        5.4%                    169      14억6천      -10억
1969  6억2천2백    6천2백      124만        2%                      210      18억2천      -12억
1970  8억3천5백    8천3백      333만        4                          254      19억8천      -11억4천
1971 10억            1억            659만        6.6                      290      24억          -14억
1972 16억2천만    1억6천2백  831만        5.1                      320      25억2천      -8억9천
1973 32억2천만    3억2청2백  1.416만      4                          401    42억4천      -10억1천
1974 44얻6천만    4억4천6백  2.447만      5.9                      554      68억5천      -23억9천
1975 50억            5억            2.768만      5.6                      602    72억            -22억
1976 77억1천만    7억7천1백  2.800만                                  818    72억7천      -10억5천
1977 100억          10억          2.800만      2.5                      1.034  100억8천          - 8천
1978                                    2.800만                                1.431
1979                                    2.800만                                1.676
1980 175억        17억5천      2.000만                                1.645  222억9천      -47억8천

  *1980년  파독근로자 계약만료 년까지 약 2억달라 이상 송금 되었으며 17년간 수출액 대비
 국가  에상 수익의 년 평균 8.7%의  성과,  파독근로자 1만 8천 명이 국가에 공헌한 수치이며
역사다 

1981    200억      20억                                                  1.800      261억3천      -61억3청
1995  1,250억4천만                                                    11.432    1.351억        -100억6천
1998    IMF
1998  1,323억8천                                                          7,355    932억8천      + 380억

                           
  위 표에 보면 1965년 수출해서 벌어 들인 수익 액  대비 독일 송금 액은 무려 16%이며, 1966년에23%, 1967년에는 18% 입니다. 그 후 수출 증가와 1968-1969 파독 이 잠시 중단 되면서 비률은 5-6%로 낮아 지지만 우리나라 총 수출입에서 계속 적자 폭이 늘어나는데 비하여1980년대까지 약 2억 달러 독일 송금 총액이 실 가득(實稼得)이라는 점에서 수출액 대비 수익 예상 액의 년 평균 8.7%가 국가 사회 발전 특별 공헌을 증명하는 근거로서 그간 여러 차례 토론 하면서 주장한 이유입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1998년에 처음으로 수출해서 년 380억 달러의 이익을 냅니다.   

 우리나라 산업 발전과 경제성장의 초기인 1964년부터 1971년도까지 과연 누가 경제성장의 디딤목이 되었는지 객관성 있게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국가적 예우를 해 줄 것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위 표와 같이 상품 수출이 많은 경우 원자재, 중간재의 수입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수한 외화 흭득은 수출액을 훨씬 밑 도는데 반해 해외 노동자 송금은 100% 순수한 외화 흭득 입니다.

 -참고로  근로자 파독이 시작되는 1963년부터 1980년 근로 계약 종료 까지 1만9천 명이 약 2억 달러가 송금되었으며, 1964년부터 1975년 까지 32만 명 참전 파월 장병이 송금한  전투 수당이 2억150만 달러(당시 한국 정부는 미군 당국으로부터 받은 파월 장병들의 전투 수당중 80%를 고국에 강제 송금토록 했음. 1968년 한 해의 경우 3.140만 달러가 송금되기도 했음.  한겨레21. 1026호 81쪽 고경태 대 기자.)와 함께 당시 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밝힙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송금된 외화가 국내 경기와 국가 수출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효과 : 박래영교수의 발표를 인용하겠습니다.
  해외 근로자(파독 근로자) 송금에 의한 외화 가득은 국제 수지 개선과 국민 소득 증대에 기여한다.
  국민소득은  “국민 경제가 일정 기간 중에 생산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화폐 가치로 평가한 것” 으로 정의된다. 해외 근로자(파독 근로자)들 의 외화 흭득은 국민 소득 계정의 해외 수취요소 소득(海外受取要素所得. 즉 자국민이 해외에서 노동.자본 등의 생산 요소를 제공한 대가를 받은 수입 액 )으로 된다고 보며 국민 소득 증가로 나타나며 근로자 송금은 가계의 소비와 저축을 늘리고 가계 소비의 증가는 최종재(最綜財재)의 수요 증대를 유발하므로 산업 생산을 파급적으로 확대 시키고 가계 저축의 증가는 투자 증대를 생성 시켜 산업 생산 능력을 확대 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고 했습니다.

  위 발표에서 해외 근로자들의 외화 송금 액에 대한 절반 이상의 중요한 효과적 부분이 누락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근로자들의 가정에 한화로 송금되어 나타난 국내 내수 진작 효과를 지적했을 뿐입니다.

  해외 근로자들의 송금으로  한국은행에 축적된 전체 외화는 오늘날 수출입 세계 11 번째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된 수출입 효과의 중요한 부분을 위 박래영교수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물론 관련 분야 전문가들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며 파독근로자들의 특별 공로를 결정적으로  과소 평가하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연구 검토하여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 져야 합니다.

=다음은 서독 정부와 금융기관이 한국에 제공한 공공차관과 상업 차관에 대하여, 서독의 공공 차관은 서독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외국(한국에 무담보로)에 제공했다고 했습니다. 담보 없이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무담보 근거는 무엇인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 1965년까지 외국으로부터 공공 차관을 제공 받은 나라는 미국과 서독 뿐이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일본의 차관을 도입하고 70년대 중반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도입하게 됩니다.                                                                         
-상업 차관도 1962년에 미국.영국.프랑스.독일에서 도입하게 되는데 독일 차관 비률이 32.4%로 미국(39.4%)다음으로 많습니다. (미국의 차관 형태는 현물 제공이 많았으며 그중에 자국의 잉여 농산물이 많이 포함되었음. 진실.화해 정리 위원회 보고서 1부198-199쪽 공. 상 차관 국가별 현황)       
-관보 2810호 에는  단기4294년(1961년3월18일)  “한.독 기술 원조” 협정이 당시 서독 정부와 한국 민주당 정부 간에  체결됩니다.

“ 한.독 조약 76호.  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  외무부장  정일형 “
조약 체결 2개월 후 5.16 군사 정부는 1961년 6월3일 “ ‘한.독 기술 원조 협정을”  다시 체결합니다.

 경제기흭원 제30호 문건은 1962년1월1일  제목 “한.독 정부 간 경제 및 기술 협력에 관한 의정서 및 경제 협력 각서” 를  교환합니다.

  근로자 파독 근거가 되었으며  미래 행복을 위해 국가가 경제개발 계획 추진을 위해(사회 간접 시설, 국가 기간 산업,  투자 재원, 기술 확보)그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 주도로 근로자 파독이 이루어진 국가 차원의  이유이고 목적이었습니다.

  위 협력 각서 교환 이후 바로  1억5천만 마르크 차관 제공이 체결됩니다.(공 공차관 7천5백만 마르크, 상업 차관 7천5백만 마르크.  KBS다큐 . 2013.5, 진실.화해 정리 위원회 보고서 1부 198-199쪽)

  -공공 차관은 미국과 같이 물자 지원 형태가 아닌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10년 거치 30년 상환,연리 2% 이자로 제공됩니다. 사회간접자본을 중점 확충하고 구체적으로 전신 전화 설비, 전기 공급, 철도 신호 체계, 부산의 상하수도 사업,  농촌 개발 사업,  공공 금융기관 여신도 제공, 중소기업에 직접 투자, 농업 부분의 각종 프로젝트 지원에 사용되었고 농업 개발을 위한 직접 투자와 광산 개발 사업도 진행되었습니다.

-거액의 상업 차관은( 1차 -3차까지 장기 차관으로 1961 1천875만 달러는 시맨트, 전기, 인조 견직물 및 삼베 공장 건설에 사용되고, 2차 장기 차관은 1964년 인천제철, 제지, 화학비료, 섬유 기계공장 등에 사용되고,  3차 차관은 1966년 2천1만 달러는 나이론 공장  등 건설에 사용) 
1962-1967년까지  27개 사업 분야에 투입되었습니다.(파독간호사40년사 한독경제협력편)

-차관 제공 과정에서 독일 Hermes 신용 보험공사가  무담보 보증을 하는데 그럴만한 근거가 무엇이며 독일측  실제 차관 집행자는 KfW(48년 마셜프랜 일환으로 설립된.정부80%-지방 정부20%. kreditanstalt  fuer Wiederaufbau  프랑크푸르트 소재 신용 회복. 국가 재건 사업.60년 이후 해외 사업)금융그릅 측입니다. 
협정 체결 후 18개월 만에 근로자 파독이 이루어집니다.

  위 내용을 연결해 볼 때 정부와 정부 간에  이 후에 갚아야 할 차관이 체결되고 18개월 후 노동의 대가 임금을 받을 근로자가 파견되므로 안전과 담보나 보증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여 이 부분도 평가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자원도 기술도 돈도 없는 극빈 국 중 극빈 국이었습니다.
  1963년 국민소득  필리핀 170 달러, 태국220달러, 한국 100달러가 파독 2년 차를 넘어서는 1966년 대망의125달러 달성, 이 귀중한 125달러를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한 파독 근로자들 이었을 거라는 계산이 쉽게 나옵니다.  산업 근대화에 불을 지핀 <1인 기업 인>들로 보기에 충분한 자료입니다.

-극빈 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냉엄한 현실에서 1962년10월 서독으로부터 시작된 서독 정부의  제공된 공공 차관은 1982년까지 총 5억 9.800만 마르크,  파독  근로들의 직접 송금과 함께 고국 산업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경제적 젖줄> 이었으며, 20년 동안 서독 정부의 차관이 지속적으로 가능했던 배경이 어디에서 연유 했는지  평가 해야 합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연속적으로 추진되었던 1964년부터 1977년 까지의 시기, 즉 파독근로자들의 송출이 이어 젖던 이 시기 총 수출 액이 1억 달러를 기점으로 100억 달러 목표 고지를 치닫던 그 시기에 우리나라가 필요했던  외화는 글자 그대로 경제개발의 종자돈으로서 빈혈 상태의  당시 한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피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파독근로자들의 외화를 벌어드린 피 땀 어린 과정을 보겠습니다.

한국은 병원에서 환자 간호를 보호자(간병인)가 하지만 독일 병원은 환자 간호를  100% 간호사가 합니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적은 우리 간호사들이  큰 체구의 유럽 환자들을  매일  수 십 명씩 일으켜 세우며 간호 과정에서 허리 등 여러 직업병을 않고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간호사 출신들이 절반에 가깝습니다. 

  지하 1,000 메터 고속 수직 엘레베이터를 타고 갱도로 내려 가는 순간부터 매일 8시간  체감 온도  40도가  넘는 열기를 이겨내야 하는 숨 막히는 사투였습니다.  안전을 제일로 하지만 수시로 발생한 안전사고로 35% 이상의 크고 작은 공상자가 발생했으며 그 외에 다 수의 직업 질병으로 고생하며 여생을 살아가는  근로자들의  귀중한 생명을 담보로 캐낸  60-70년대 벌어 들인 금보다 더 귀한 외화였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잘살아보겠다는 의지에 의해 머나먼 이국까지 노동자의 신분으로 왔지만  내용적으로는 국가 경제적 필요에 의한 외화 흭득의 목적이며  그 위에는 민족 중흥이라는 대 명제를 향하여 도도히 흐르는 당시 조국 대한민국 역사의 부름에 응하여 겁도 없이 이역 만리 땅으로 옮겨와  청춘을 불사른, 오직 역사의 의지만이 할 수 있는 집단 이주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다음 2부로 넘어가기 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월급 담보 문제 허위 부분)

    “근로자 파독”에 대한  글을 쓰면서(근로자 본인들, 작가,수필 인들, 개인 자서저 등)  구체적 내용 확인 없이 떠 도는 말들을 사실인 듯  인용하는데 삼가해야 합니다.
 
 파독근로자들의 월급을 담보로 국가가 차관을 얻어 경제 발전시켰다는 말인데 우리들의 월급을 담보로 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논란이 되었던 정보의 진원은 1997년6월 나온 백영훈 박사의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인데 2000년2월 엣쉬보른 시민회관에서 교포신문 200호 발행 기념행사에서 백영훈 박사는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성과를 60년대 당시의 여러 일화를 곁들이며 파독근로자들를 담보로  한 독일의 산업차관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백영훈 박사의 선의(?)의 과장이 특정 역사적 사실의 전승에 심각한 굴절을 일으킨 일탈이었습니다.    백영훈박사는 후에 자신의 책의 일부에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했으며 2008년 “과거사 진상위원회”가  담보 차관설은 사실과 맞지 않음을 밝혔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2015,2.26.국회 공청회이영석교수발표문)                                                 


        2부   
=파독 근로자들의 경제발전에 대한 간접적 기여와 장기 거주로 인하여  이루어낸 성과들이 세계화 시대에 국가 자산(편익)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을 말하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지난 60년대 독일과 유럽의 일반인들이 코레아가  세계지도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던 국민소득 100 달라,  신생 국가 때부터 이며 근로자 파독으로 인하여  “사회 문화적 효과”  와  “ 재외 한인 동포 사회 형성과 발전에 기여” 한 부분과,  “외교적 효과” 등 을  파독근로자 재독 동포들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 “근로자 파독의 배경과 과정, 그 경로’ 를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까지 미국의 대외 원조기관(United States Operation Mission 즉 USOM)으로 부터 무상 원조를 받았으나 이후 무상이 중단되고 유상으로 전환 하게 됩니다. 미국의 대외 원조기관(USOM)은 한국 경제 실정을 알고 있으므로 고민을 하게 됩니다.

  -1957년부터 일본 광부들이 2년 기간으로 400명 씩 파견되었으며 1963년8월 계약이 만료됩니다.  USOM(미국 대외 원조기관)은 여기에 주목하고 1960년  한국 광부를 중개 하고자 서독정부에  자체 기획안( “ A Proposal of Korean Labo<Minors> Employment to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 [독일연방공화국으로의 한국 광부 고용에 관한 계획(안)](독일연방문서고 소장자료, 위원회 보고서 176쪽 ) 을  통해  적극 추천합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루루광산협의회에 권유하게 됩니다.

  당시 독.미간의 상황은 마샬정책에 의한 경제 진행과 최대의 미군 주둔 등 독일 경제 정치 상황이 미국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일로서는 무겁게 받아드릴 수 밖에 없은 시기였습니다.

-1961년3월18일 당시 서독정부는 한국 민주당 정부 (관보 2810호  한-독 조약 . 76호 대통령윤보선. 국무총리 장면.  외무부장관 정일형)와 한.독 기술 협정을 체결합니다.

-1961년4월14일(민주당 정부), 체결 26일 만에 대한석탄공사 사장은 방독 루루 탄광지역에 한국광부 파독 각서을  체결 합니다.

-경제기획원 제30호 문건, 1962년 1월1일 당시 군사정부는 경제원조까지 포함한 “한-독 정부간 경제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 을 체결합니다.

-1962년 5월24일 서독  MAN 회사가 주 서독대사관을 통해 500-1000명 고용 의사를 밝혀옵니다.(이 부분은 결과 미ㅐ확인)
-1963년2월1일 주서독대사관은 서독연방 보건성과 토의 파독을 추진합니다.

-1963년5월11일 서독연방 노동성은 250명 고용할 의사를 정식으로 표시 하게 됩니다.
-1963년12월21일 근로자 파독이 시작 됩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노무관의 관리를 받습니다.
(2013년7월 KBS다큐. 진상위원회보고서 173쪽)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가가 주관한 근로자 해외 진출은 파독근로자 진출이 최초입니다.

  단순 근로자 진출이 아니라  조국 대한민국이 국가의 미래 행복을 위해, 국가가 장기적 경제개발 계획 추진을 위해(사회 간접 시설, 국가 기간 산업, 투자 재원, 기술 확보) 그 계획의 일환으로 국가 주도 하에 근로자를 모집하고  파독이 이루어진 국가 차원의 이유이고 목적이었습니다.

  -간호사의 경우 1950년대 후반부터  1966년1월까지는 민간 주선으로, 1966년3월부터 1969년까지 정부와 민간 동시 주도,  1970년부터 1976년까지 정부 주도로 파독 되었습니다.
-광부 7.936명. 간호사 10.723명. 총 1만 8천 659명이 파독 되었습니다.(위원회 보고서 225쪽)
  결과는 그 가치를 환산 할 수 없는 엄청난 국가적 대성공이었으며 현재 진행형입니다. 
 
 -현재 2차 세계 대전 이후 140여 신생 국가가 탄생했지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유일한 국가라고 오래전에 세계의 눈은 진단했습니다. 

2.독일 동포사회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약 2만 명의 광부, 간호사가(광부: 7,936명, 간호사 : 10,723명) 서독으로 진출하여 최소 39년에서 반세기를 넘어 52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장 입니다. 

-현재 파독근로자 출신은 약 6,0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귀국하거나 다른  유럽 국가와 미국, 카나다,호주 등 제 3국으로 이주  재외 동포 사회를 창조, 선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동안 1만 명 이상의 간호사들이 서독의 병상에서 1973년의 경우 452개 병원(독일 전체 12.6%.  6,124명) 에서 언제나 미소 짓는 간호사, 늘 친절한 간호사, 예의 바른 간호사, 환자들로부터 신뢰 받은  극동에서 온 백의 천사로 서독의 매체들은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약2,800 명은 다문화 가정을 이루어 가면서 한 사람이  배우자 친구들과 이웃  그리고  6촌  이내의 친척들까지 한 가정을 기준으로 약 50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게  한국의 고유 문화를 알리며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코레아에 대한 우호적 인맥을 쌓았습니다.(50명X2,800가정=140,000명, 넓게 는 수 백 만 명)

-동포 전체(다문화 가정 포함) 약 6,000 가정에서 태어난 2세들과 1.5 세대들은 1만 명이 넘습니다.    유치원부터 각 반에 약 30명 씩 12년 공교육과 대학 생활, 사회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학우들, 그들의  학부형들, 직장 동료들은 한국인과 피부로 느끼며 맺어온 우호적 인맥이며 그 힘은 거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2세대들이 유럽 사회에 진출하면서 현재는 물론 후대에 까지 어머니의 나라 코레아를 독일과 유럽에 연결 시키며 우호적 인맥을 지속적으로 형성해 나가며 이들로 인하여 수 만 유럽 입양 젊은이들에게 정체성과 연대성을 갖게 했습니다.
                                                           
-파독근로자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로  2세들은 독일 학생들을 포함 2006년 독일 연방 통계청 자료(2007년11. 대전.“독일과 한국의 이주 노동 미래를 향한 연대  포럼 ,독일 이주민 자녀 교육과 문화 발표<선영인>) 에 의하면
    고졸 자격 시험 아비투어<Abitur> 합격 비률이 독일 학생 30% 터키 학생 19%에 비해 한국 2세들은70%<이유채.최선주”전도된 개발 원조:독일로의 한국인 노동이주 2006년> 를 넘어  여러 외국인 자녀들에 비교가 안되는 대학 진학률, 석사,박사 학위 취득률, 그들이 유럽과 독일 사회에 진출 하는 성과는 개인적으로는 가정의 행복이며 보람이지만 국가적으로는 조국의 무한한 자산입니다.

  이들은 단순 유학과 달리 유치원부터 현지 문화와 정서를 겪고 배우며 실력을 쌓은 세계화 된  정예입니다.

  국내에서 이와 같이 현재 수준의 교육을 위해 미국,카나다,호주,영국 등지에서 유학 시켰다면 국고 수 조 억 달라(미국 1인 유학생 1년 평균 비용 약 3만 달러)를 갖다 써야 하지만 파독근로자 출신 동포(유럽.미국.카나다.호주)들은 단 돈 1달러도 국고를 쓰지 않고 유럽 사회에 진입 시켜 놓았습니다. 

 -.유럽 사회에 일찍이 파독근로자 출신 태권도 사범들이 국기를 보급하고  유럽 각 국가의 경찰과 안전 기관 요원들에게 교육 시키며 국가 위상을 높이고, 공직 사회까지 우호적 인맥을 넓히는 성과를 시발점으로 올림픽 종목으로 선택하는데 일조 했음을 조사 평가할 부분입니다.

  이러한 파독근로자들의 반세기 이상의 삶은. 현지인들과 직접 인간의 감정과 문화로 접하면서 유대관계를 지속하여 코레아에 대한 우호적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온 힘들고 때로는 이국인으로서 서러움을 극복하며 엮어온 삶의 역사 입니다. 


-왜? 현존하는 사실적인 것들을 길게 나열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맺어진 우호적 인맥들은 현지 시중에서 6. 70년대 여러 3류 국가 제품들 중에 Made in Korea를 선택하는데 한발 더 가까이 섭니다.

  이 세상에서 안전과 실용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일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럽과 세계인들 앞에서 값이 상대적으로 고가인 코레아 제품을 주저 없이 구매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직시한 유럽인들과 세계인들은, 우리도 메이드인 코레아를 사용하는데  무슨 여러 말이 필요 하느냐 ! 한국의 상사, 항공사, 금융사들의 유럽 본부 지사를 독일에  개설한 까닭이며 근거 입니다. 

-중국의 어느 지도자는 미국을 종이 호랑이라고 하면서 인구 3억 대 12억, 전쟁이 나서 1 대 1 이 되어도 9억 명이 남고 설사 핵 전쟁으로 양 국가가 잿더미가 된다 해도 중국은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교들이 들어와 재건한다면서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파독 근로자들이 장기 거주로 인해 많은 고국의 형제, 자매와 친척들이 독일과 서구의 질 높은 무료 선진 사회 교육과 연수 등을 받을 수 있게 여러 정보와 기회 제공을 해준 역할, 그들이  성공적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여 한국 사회 여러 곳에서 선진국 사회를 설파 하므로 조국이 선진 사회로 지향하는 정책에  기여한 업적은 700만 해외 여러 동포사회에서 유일하게 파독근로자 동포 사회에서만 가능했기에 그 내용을 평가 받아야 합니다.

-파독근로자들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의 예우를 바라는데 대하여 반론으로 “ 잘살아보겠다고 수 많은 경쟁자 속에서 선발되어 자발적으로 외국에 나간 사람들이 이제 와서 무슨 국가적 예우를 바라느냐? 는 말들에 대하여  “신촌에서 현대 공업사를,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1945년 부산에서 락키화학(LG)을,  1896년 동대문에서 두산그룹 등 그리고 그간 명멸해간 많은 기업 창업주들이 사업 시작하면서  과연 국가를 위해 창업했을까요?

-창업할 때 사업이 번창하여 자식들 교육 잘 시키고  가문에 영광과 대대 손 손 부자 되자는 것이었지 그 분들이 국가 위해  창업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군사 정부는 부정 축재자로 수감되어 있는 기업인들까지 석방 시켜 모든  기업들을 적극 지원하여 6. 70년대  국내에서는 최고의 재벌들이 되었습니다.

-수출을 위한 국제 시장에 통용되는  상품 생산을 위해 필요한 기술과 설비, 원자재 등을 수입하고 싶었지만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도 한국 돈을 받은 곳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국가의 총력적 지원과 특혜를 받고 해외 근로자들이 벌어 들인 외화와 그를 담보로 한 외국 차관까지 지원 받아 수출 사업 하면서 훈장도 받고 지속적으로 수출 보조금, 조세 감면, 저금리 금융 지원, 노사 부분 등 등 국민적 부담을 증가 시키며 온갖 혜택을 받아 오늘날  대한민국 상류 사회에서 그들 만의 문화가 형성 되는데 그 밑 거름이 되어준 노령 사회로 접어든 파독근로자들의 당연히 받아야 하는 정당한 예우와 권리를 요구 하는데 그 무슨 다른 말이 여기에 필요 하겠습니까.

-더 쉽게 말하자면 형사가 형사 직업을 선택하면서 훈장 받기 위해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인으로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충실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업무를 잘 이행하므로, 비 긍정적일 수 있으나 수사 잘하고 성과 올리니 자연히 국가는 그에게 훈장도 주고 승진도 시켜 줍니다.

-특별히 강조할 부분은 경제적 기여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오늘날 한, 독간의 우호 관계가 이토록 돈독하게 된 밑 바탕에는 간호사 광부들의 반세기에 걸친 외교 문화 사절로서 
                                                       
3.
1960년대 당시 국가 경제 발전에 외화로 기여한 세 부분이 있습니다.

-1963년 근로자 파독, 1964년 베트남 참전, 70년대 중동 건설 현장 입니다.
 첫 째  베트남 참전자들의 경우 2012년 7월부터 국회를 통해 국가 유공자로 국회에서 인준 했습니다.(본인은  수 년 전부터 파월 참전 국가 유공자로서  대우를 받고 있어 떳떳하게 1년의 참전과 파독 50년사를 비교하여 파독 근로자들의 국가사회발전 특별 공헌이 중요하다고 판단 되어 역사에 남기고자 이를 주장하고 추진 하게 되었습니다.)

둘 째 중동 진출 건설사들의 경우  진출 초기 공사를 수주할 수 있게 국가와 현지 공관이 총력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공사 마무리까지 국가 차원에서 “예” 를 들어  어느 중동 국가 원전 수주를 위해 국가 수반이 국정을 미루고 한 순간에 갔다 올 정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중동 건설 근로자. 원양어선 근로자. 조선공 근로자. 간별사.요리사 등 많은 직종의 해외 취업자들이 있으나 모두가 개인별 계약 근로 조건입니다. 국가가 국가의 목적을 위해 국가가 주도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지해야 함 )
                                                                                                                                         
세 째 조국 대한민국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국가 경제발전에 소임을 다한 파독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경제 활동을 위해 파독 했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국가에 공헌했다면 응분의 대우는 당연하기에 주장하는 이유이며 근거 입니다.                                                                                                             

  그 동안 대통령 다섯 분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다녀간 국회의원, 정부 고위 관료, 지방자치단체장, 심지어 동네 리장 반장까지 조국이 어려울 때 외화를 벌어 들인 파독 근로자들의 노고를 치하면서 응분의 예우를 해야 도리라고 해 왔던  찬사를 실제의 삶에서 느낄 수 있도록 국가 정책으로 제도화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국가는 국민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할 책무가 있음” 을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과업을 완수한, 이제는 노년에 접어든  파독 근로자 출신들을 어찌 대한민국 조국은 언제까지 모른 체 해야 합니까.
세계 11대 무역 대국으로 성장한 시대를 살아 가는 조국 대한민국과 더불어 5천만 동포가 실질적인 대답에 따른 행동을  해야 할 차례 입니다.   

2011년3월31일 국회 도서관 대 강당에서 개최한 전 한나라당 이애주  전 국회의원의 <파독 간호사 평가 사업 최종 보고 대회>에서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경제적 선진국으로서의 시작이 없었을 것이며, 우리가 지금 누리는 국가적 위상과 풍요는 우리의 것이 아닐 것이다. 라고 보고한 다음에 “국가와 사회가 이들을 위한 시설적인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라 고 건의한 바 있습니다.   

-국가가 필요하다면 없는 법도 만들어야 하지만 개정안에 따라 국가 유공자 법 제4조 제1항 제18호에서 규정한 “국가 사회 발전 특별 공로자”  에 의거하여 세계 경제 11번째 대국에 걸맞게 다음의 꼭 필요 사항을 입법 하여줄 것을 파독근로자들의 이름으로 호소합니다.  2015년 11월 7일 청원 추진 위원장 선경석

=자료출처(전체 내용):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보고서.한국 무역 협회.재무부.한국산업은행1993. KBS다규특집(2013년5월).파독간호사40년사.관세청통계2008.한국노동 통계연감1976년 작성.한겨레21 고경태기자.경상대 이영석교수발표문.=

    *다 음 
1.조국 방문 때 편리한 숙박 시설(약 50침대)
2.독일에 “역사.학술.문화관(엣센문화관 유지비 포함) 건설.(1세대는 물론 2세대들 구심점을 만들어 여러 분야에 한국의 유럽 전진 기지화.)파독근로자 이민사 자료 준비와 사업 지원
3.국가 산업 유공자 예우.
4독일 병보험이 한국에서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게 교섭.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파독 근로자 국가적 예우 어떻게 할 것인가. 추진위원장 선경석 

추천3

댓글목록

Fuchs님의 댓글

Fuch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기고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의 뒷 배경이 어떻게 진행됬던것인지 알 수 있었던 점이 좋았습니다.

참,,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네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위해 헌신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을 말씀드릴수밖에 없겠습니다..

  • 추천 1

somageist님의 댓글

somagei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당시 간호사 급여가 한국의 장관 월급이었다고 합니다. 60년대, 70년대 그런 환경에 있었죠.
또 당시 서독 광부 모집에 참여할려고 엄청난 경쟁을 뚫고 간 분들은 행운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그 급여를 국가에 다 헌납했나요?
북조선 근로자들은 중국이나 러시아 벌목공으로 일하는 데 받은 급여를 반납한다고 한국 언론은 말하고 있는 데 그 진실은 모르겠습니다.

전 70년대 초 전태일의 상징적 사건에 주목합니다. 청계천 주변의 시다들, 10대 후반의 젊은 누나들이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나와서 동생학비을 벌기 위해서, 부모의 생계를 벌기 위해서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 역사를요. 그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전태일은 그 시다들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노동법을 껴안고 분실자살하게 됩니다.

80년대는 많은 근로자들이 중동의 오일달러를 보고 열사의 나라에 토목공사에 동원됩니다. 당시 매년 수 십억 달러 이상의 돈들이 오일달러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들어오게 됩니다. 당시 사회의 문제점은 남편은 나가서 돈벌어 송금하면 집에있는 부인은 춤바람 나서 집안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서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지요.

어찌보면 독일에 파독 근로자로 오신 분들은 좋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시절의 국내보다는 더 세상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던 환경에 감사하는 게 더 좋은 자세가 아닌 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하는 마음.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그런 자세가 아쉽습니다.

  • 추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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