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서평이라 함은
독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독서의 충동을
문학 이론가들에게 연구의 욕구를
비평가들에게 비평의 칼날을,
그리고 저자에게는
보다 알찬 내용을 주문하는 데 있다.
또, 아무런 욕구도 없는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눈요기라도 줄 때
그 역할을 다한다.
(KMJ,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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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출판사 '아티초크'에서 내놓은 "브레히트 시선"을 두고 "국내 출판사가 '브레히트'로 '찌라시'가 되는 지름길"이란 제목으로 작가 브레히트와 번역을 좀더 신중하게 다룰 것을 주문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한국 브레히트 학회'가 브레히트 시를 전공한 국내 브레히트 학자들이 오랜 기간 동안 공동으로 번역해서 "브레히트 선집"의 일환으로 브레히트 시선집 (5, 6권)을 2015년 벽두에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이 시선은 이제까지 국내에서 브레히트 시 50-70편을 번역 소개한 여타 시선집과는 달리 30권으로 출간된 "브레히트 신전집 GBA" 중에서 11-15권에 편집된 시를 국내에 다수 번역 소개한 귀한 작업이다. 물론 인쇄 출판을 기꺼이 감행한 출판사 "연극과 인간"의 희생 정신도 높이 살만 하다. 이 시선은 브레히트 시집 5권 중에 '시모음집'인 11-12권에서 '소네트 모음집'을 위시해 몇몇 '시모음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들을 번역했고 브레히트가 '미완성 시'로 분류해 두었던 13-15권의 시 중에서 40여편을 추가로 번역한 선집이다.
브레히트 학회에서 여러 시 전공 학자들이 힘들여 내놓은 이 시선을 통해서, 필자가 직접 시도하고 있는 "브레히트 시, 777선 번역 프로젝트" 이외의 시들, 즉, 브레히트 자신이 묶어 출판했거나 모음집으로 분류한 대부분의 시들이 국내 독자들에게 번역되어 방대하게 처음으로 소개된 점에 큰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브레히트의 새전집 30권 (GBA)
무엇보다도, 한국 브레히트 학회의 시선집은 국내 독자들이 브레히트 신전집의 시들을 그대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큰 의미를 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광규 시인이 번역한 국내에서 첫 브레히트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1985년에 초판되어 이제껏 그대로 출판되고 있고, 그 이후에 산발적으로 부분 번역이 되어 독자들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50편 정도 수록된 이 시집으로 인해 원문이나 전집을 접할 수 없는 독어를 모르는 일반 독자나 연구자들이 작가 브레히트와는 아주 동떨어진 주장이나 오해를 양산했던 점도 없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브레히트 학회가 내놓은 이번 시선집은 번역된 시들을 통해 시인 브레히트의 시의 세계를 좀 더 가깝고도 폭넓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본다.
이 시집 뿐만 아니라, 브레히트 선집 6권 출판에 참여한 모든 동학들이 브레히트 문학에 대한 남다른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번역에 임한 것으로 사려된다. 모두들 국내 대학 강단에서 종사하는 번역가들이 국내에서 인문과학과 어문학의 경시로 과거와는 달리 '독문학, 그것도 브레히트 문학에 정열을 쏟을 후학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번역 작업에 학자로서의 양심과 실력을 고스란히 쏟아부었을 것을 믿어마지않는다. 그렇기에, 전업 번역자로서가 아니라, 브레히트 전문 학자들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브레히트 선집을 내놓은 동학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며, 아울러 이 선집을 통해 국내 독자들이 브레히트를 보다 바로 아는 일에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 브레히트 학회가 출판사 "연극과 인간"에서 출판한 "브레히트 시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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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시선은 약간의 아쉬움을 깊게 남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1985년 브레히트 시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고 30년이 흐르고 난 뒤에서야 나온 브레히트 시 번역이다. "브레히트" 이름만으로도 국내에서 금서가 되었던 어두운 시대를 지나, 당시 "한마당" 출판사가 과감하게 시도했던 모험과는 달리 "브레히트 선집"을 출판하는 현재 국내 사정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열악한 인쇄물 시장"에서도 어려운 시도였으리라 본다. 더 나은 미래와 발전을 위해, 단순한 번역자가 아닌 국내 강단에 종사하는 동학들이 번역서에 남기고 있는 아쉬운 점을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필자가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점은 '이미 국내에 소개된 기존 번역들을 극복하는 번역이 출판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예를 들어, 김광규 시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살아남은 나"로 원어에 가깝게 번역될 것이 아니라, 작가 브레히트가 시를 쓴 의도와 가깝게 "살아남은 자의 분노" 정도로 번역되었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브레히트 시의 제목이자 시집의 제목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지난 30년간 국내 독자들에게 아주 강하게 전달된 것에 비해 "살아남은 나"란 제목은 어딘가 너무 심심하고 색깔이 없는 시로 전달될 가능성을 다분하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점은 시집 표기상의 문제이다. 정초왕 선생은 스테핀 Steffin을 굳이 기존 표기인 슈테핀 Schuteffin (6권 123쪽, 해설 390쪽 이하)으로 선택한 오류라 보겠다. 브레히트 문학에서 스테핀 Margarete Steffin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할 때, "슈테핀 시편"이라는 제목은 브레히트 전공자들이 할 수 있는 단순한 실수로 보기에는 "초등학생 수준의 실수"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국내에서 어느 누군가에 의해 "슈테핀"이라고 잘못 표기된 것을 브레히트 학회에서 펴내는 "브레히트 선집"에서조차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잘못을 그대로 따라 표기한 점은 '치명적' 아쉬움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시 전공자가 아닌 브레히트 전공자가 지적할 수 있는 '번역 작업에서 나타난 너무나 간단한 언어를 가벼운 번역으로 인해서 생긴 치명적인 오류들'이다. 번역된 시 자체보다는 일례로 번역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가지 예를 들자면, 번역에 참가한 동학들이 독어 원문에 충실한 나머지 "오늘 밤 heute nacht"까지도 독어 원문에 따라 그대로 한국말로 옮기는 실수를 다수의 번역자가 똑같이 범하고 있는 사실이다.
브레히트가 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heute nacht"는 운율을 맞추거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시어이다. 독어에서 논리적으로 0시부터 6시까지 밤도 독어식 표현은 'heute nacht", 즉 '오늘 밤'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오늘 밤"은 "오늘 아침"과는 달리 다가올 미래 시간의 표현이다. 이 시어에 적합한 번역 시어는 김광규 시인이 택한 "간밤"이나 "지난밤"이 적절하다고 보겠다.
그런데, 시 번역에 참여한 동학들이 놀랍게도 한결 같이 이 간단한 독어에 비슷한 실수들을 범하고 있는 점이다. 우선적으로 GBA 11-12권을 중심으로 브레히트가 어떤 시에서 "heute nacht"를 사용하고 있는지 BCI2000을 통해서 찾아보면,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Computer Text: D:\WORDCHU\GROSS\GEDICHTE\GEDI-SA.BCI Fundstellen: heute,nacht
|V03 Ich habe Ihnen heute nacht bitter unrecht getan; (Bertolt Brechts Haus 55:3)
|V21 So hoch herauf, Green, daß der Sturm so zu Ihnen kann,
wie heute nacht? (Bertolt Brechts Haus 55:21)
|V09 Wäre es heute nacht. (Svendborger Gedichte 16:9)
|V18 Wäre es heute nacht. (Svendborger Gedichte 17:18)
|V26 Wäre es heute nacht. (Svendborger Gedichte 17:26)
|V34 Der Streicher spricht heute nacht. (Svendborger Gedichte 17:34)
|V03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Gedichte im Exil 125:3)
|V02 Im Traum heute nacht (Buckower Elegien 315:2)
파일다운로드 (www.bci2000.de/heutenacht.txt)
BCI2000가 제시한 검색 결과를 바탕으로 각 번역자들이 이 시어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맨 먼저 "가정기도서" 묶음시를 번역한 안상원 선생은 "푸른 나무에 대한 아침 인사" (5권 33쪽) 란 시에서 3행과 21행의 "heute nacht"를 "어젯밤"이란 시어로 번역하고 있다.
번역자가 사용한 "어젯밤"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바로 앞날의 밤"이란 뜻을 가졌다. 이 말은 "간밤"이나 "지난밤"의 유사어이기 때문에, 번역시에서 의미상으로 그리 무리가 없다 하겠다. 하지만, 단순한 번역이 아니고 시인이 이 시어를 택할 경우를 생각하면, "어젯밤"보다는 "간밤"이나 "지난밤"을 선호할 것임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두 시어가 "어젯밤"보다는 훨씬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 김광규는 당연 이 시어를 "간밤"으로 택하고 번역했을 것이다.
이 시어의 번역과 연관해서 "스벤보르 시집"과 "부코 비가"를 번역한 김길웅 선생은 번역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유태인 창녀 마리 잔더스에 관한 발라드" (6권 23쪽 이하)에서 후렴에 반복되는 "heute nacht"를 일괄적으로 "오늘 밤"이란 시어를 택하고 있다. 번역시에서 의미상으로는 그나마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2연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2연에서 시간을 표시하는 시어들 "heute 오늘", "gestern 어제" 그리고 "heute nacht 간밤"이 동시에 모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스스로 논리적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시어 "heute"조차도 "오늘 밤은 어제와는 달리"라고 번역해서 "오늘 밤"이란 시어로 이해하고 있다. 번역자가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heute nacht"에 대한 "한국어 시어"를 좀더 고민해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너무나 치명적인 오류'로 볼 수 있다. 이 번역 시어를 두고 시 자체를 보면, 이런 시어 선택의 오류로 인해 번역자가 '브레히트의 시 내용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지 않은지?"하고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런데, 김길웅 선생은 같은 시어를 "철" (6권 310쪽)이란 시에서 다시 "어젯밤"을 택해 번역하고 있다. 시가 과거형으로 표현되고 있기에, 앞의 시 번역에서처럼 "오늘 밤"으로 번역하기에는 논리적 모순을 엄청 감지했을 것이다. 결국 "어젯밤"을 택했지만, 안상원 선생이 택했던 아쉬움을 그대로 번역에서 남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시 "살아남은 자의 분노"란 번역에서 해당 시어를 "오늘 밤" (6권 363쪽)으로 번역하고 있다. 시가 과거형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어는 "간밤", "지난밤"으로 번역되어야 논리적 모순이 없게 된다.
이제까지 살펴본 '가벼운 오류들'은 지극히 사소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인쇄 출판물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될 오류들이기도 하다. 독어에 초보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heute nacht"의 사전적 의미는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기본적인 어휘이다. 하지만, 한국 브레히트 학회가 번역한 이 시선집이 앞으로 또 다시 30-40년 동안 계속 인쇄되어 국내 독자들에게 다가갈 것을 생각하면, '가벼운 실수'라고만 볼 수 없는 실수임에 분명하다. 번역, 그것도 시의 번역은 쉽고 가볍지만, 우리에게 항상 무겁게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시 전공자가 아닌 필자가 굳이 "브레히트 시, 777선 번역 프로젝트"를 온라인 상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5년 초봄에)
배경 음악은 Omar Akram의 "Black nigh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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