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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계몽주의 사조와 기독교의 갈등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영수이름으로 검색 조회 4,386회 작성일 02-03-07 17:19

본문

작성일 : 1999/03/16  조회수 : 140  
동아대학교 '독일학연구' 제 14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 계몽주의 사조와 기독교의 갈등
이  영  수*

1. 서론

서구 유럽의 변혁기에는 엄청난 폭동과 내란을 겪어야 했다. 모든 사건사고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과 다양한 원인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뒤배경을 이루는 공통분모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종교전쟁이었다. 루터가 1517년 이데올로기 논쟁을 시작한 이후 프랑스 내란, 필립Ⅱ세에 대한 네델란드의 반란, 메리스튜아트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폭동, 1588년 영국에 대한 스페인의 공격, 30년 전쟁(1618-48), 청교도 혁명(1640-1660) 명예 혁명(1688)등이 모두 종교전쟁으로 말미암았다.

이 시대는 십자군과 순교자들, 음모와 학살, 광신적 폭도들, 찬송가를 부르는 군인들의 시대였다. 그들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거의 끝났을 무렵 그들의 생활에 영구적인 낙인을 남겨 놓았다. 자유와 관용, 정당정치, 상업방법, 사회구조, 과학, 철학 그리고 예술에 대한 새로운 개념들이 바로 그러한 영향들이다.

이러한 종교전쟁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이론논쟁은 바로 서구 계몽주의로 지칭되고 있는 자연과학의 발달에서 비롯된다. 종교적 골격에 정치 조직을 입힌 사회제도는 종교골격의 새로운 해석으로 이 세상의 삶의 자세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기독교에 의해 지배를 받아 오다가 자연과학의 발달과 사회의 변혁으로 시민의식이 차츰 높아지면서 개인 존중과 인간중심의 사고로 바뀌어 간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에 바탕을 두고 현세적 삶의 행복과 효용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어 그 당시 주도적 지배세력인 기독교와 마찰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인간이성의 사용은 곧, "종교에 대한 신앙의 검증이다."라는 피츠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계몽주의는 종교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로 대변되는 태양 중심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지동설, 그의 독창적인 실험, 『아이작 뉴튼(Isaac Newton 1642-1727)의 뛰어난 재능이 과학혁명의 절
정에 다다르게 했다. 또한, 과학적 철학자로 알려진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광학,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의 과학분야에서 상당한 공헌을 했다. 특히 위대한 그의 공헌은 그의 독자적인 사고방식(Intellectual Method)의 개발에 있다. 그는 자연연구에서 의심스러운 모든 선입감을 버리고 명료하고 정확한 개념들로써 지적구조물을 지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갈릴레오의 역학, 데카르트의 수학 등의 바탕 위에서 「물리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를 1687년에 완성했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시작된 과학혁명은 이 책으로 완성되어 향후 200년 이상 과학사상을 지배해왔다.

과학을 면허장으로 하여 온갖 분야에 대한 인간의 주장을 비판적 자유를 갖고 점검하기 시작했다. 본문 논문에서는 성경의 교리에서 또는 계시가 가져다주는 예언적 지식보다는 이성적 추론으로 일상성을 풀어 가는 이성과 계시간의 공공연한 투쟁이 독일에서는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있다. 10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해온 신앙에 대한 반역의 역사를 한번 탐색해 보고자 한다. 아직 한번도 제대로 의심해 보지도 않고 권위와 사제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 삶을 재단하던 서구인들이 마침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2. 서구의 계몽사상

인문주의자들이 비판적인 지성으로 과학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조종하고 지배해온 지난날의 권위적인 중세의 사상구조를 건드려 보았다. 여러 세기 동안 과학의 세계에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학설이 진리로 통용되어 왔다. 그러나 16세기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과학적인 관찰과 실험에서 얻은 결론이 과학적으로 더욱 타당하고 옳다고 여기게 되었다. 16세기 과학계의 혁명적 저작은 코
페르니쿠스의 「전체궤도의 회전」과 베살리우스의 「인체해부학」2권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우주체계를 생각해 내었고 프톨레마이우스의 우주관을 반박했다. 베살리우스의 인체에 관한 뛰어난 해설은 그 자신의 의학실험으로 얻은 것이다. 상세한 인체의 해설은 정확성과 수법에 있어 종전의 모든 저작을 웃도는 것이었다. 과학이 전통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것은 17세기이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한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는 행성의 궤도는 원이 아닌 타원이었다. 케플러의 용감한 주장에 호응하여 갈릴레오(Galileo)는 동체(動體)의 성질에 관한 탁월한 이론을 만들어 냈고 하아비는(Harvey)는 혈액의 순환을 발견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과학자체만이 아닌 그 방법론이 문제가 되었다. 과학적 방법을 설명하고 정당화시키는 철학체계 즉 과학과 철학의 결합이 과학혁명에 결정적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이다. 17세기 과학철학자 중에서 가장 괄목한 인물은 데카르트(Descartes), 갈릴레오(Galileo), 프란시스 베이컨(Bacon) 세 사람이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수학자로서 여러 과학분야에 대단한 공헌을 했고
그 중에서도 특기 할만한 사항은 그의 독자적인 사고방식으로 알려져 있는 지적사고방법의 개발이었다. 그는 과학적인 개념을 완전한 명징성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수학이라고 못 박았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철학자들에게도 과학 탐구는 수학적인 성질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과학적 사색을 이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物) 자체의 관찰과 실험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태양의 흑점 발견이라던가, 관성의 법칙에 대한 종지부를 찍은 실험도 중요했다. 그는 수학, 기계제작, 실험, 몽상 등으로 인간의 우주에 대한 관념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주었다. 베이컨은 실용적 과학의 창시자로서 지식 그 자체가 일종의 덕이라 생각했다. 그는 과학이 인간의 삶에 유익하고 편리하게 작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많은 과학자들이 그를 따랐다.  

뉴우튼은 무대가 완비된 자리에 나타난 배우였다. 베이컨의 사고방식, 갈릴레오의 역학, 데카르트의 수학, 왕립학회회원의 상호협력 등이 이루어진 상태의 정점에 출현한 것이다. 그는 미적분을 완성하고 백색의 빛을 온갖 색의 혼합이라는 매우 중요한 광학법칙을 발견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연구해 냈다. 1687년 「물리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출판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과학사상에 새로운 금자탑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수많은 과학적 발견보다는 그의 방법론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물의 성질을 깊이 탐구하고 그 성질을 실험에 의해 확립해 가는 것이다. 그는 과학적 방법을 어떤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겼고 동시에 그의 겸허한 주장도 설득력이 있었다. 세계는 신비적인 것이 가득차 있고 분별 있는 사람들은 결과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계몽사상의 결정적인 에너지는 과학적 방법과 인간의 겸허함이 결합되는 자리에서 폭발했다. 다시 말해 참을성 있게 탐구하는 자세와 과학적 탐구방법이 그것이다. 그의 이런 방법적 사고방식은 비과학 분야인 신학, 역사, 도덕 전체에 응용되어 인간의 제1원인(神)에 대한 공상없이 인간운명의 실제개량이나 변화에 힘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뉴우튼의 이런 기여는 신을 위대한 장인(匠人)으로 만들어 이신론자(理神論者)를 만들어 내고 나아가 신을 깡그리 부정하는 무신론자까지 생겨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서구 계몽주의의 발달로 이성과 계시간의 불안정한 평화는 무너지고 공공연히 대립하면서 영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로 번져 나갔다. 과학혁명은 1000년을 지배해온 신앙에 대한 반역이 시작된 것이다. 서구 계몽주의는 종교와 관련된 것이고 이는 신학과 신앙의 절대 권위로부터 인간 이성에 도전을 받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었다.

3. 자연의 외경사상

태양이 뜨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피어나는 자연은 아름답다 못해 신비스럽다. 자연의 사계절 변화를 지켜보면 자연의 신성함이 우리에게 외경사상을 불러 일으킨다. 서구의 사람들이 이런 변화를 가져다주는 자연을 바라보며 신을 생각하고 그런 자연이 곧 신이 아닌가 하는 범신론적 세계관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범신론적 사고의 효시는 베네딕트 스피노자(Benedict Spinoza ,1632-1677) 이다. 1656년 그의 시나고그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파문에 처했다. 네델란드의 캘빈주의 승려들은 그를 무신론자로 낙인 찍었다.

스피노자는 누구보다도 경건한 깊이 있는 종교인이었다. 그의 신관(神觀)이 몽테뉴의 회의론, 홉즈의 유물론 못지 않게 정통 유태인들과 프로테스탄트, 카톨릭 교도들을 분노케 했다. 그는 자연이란 모든 사상, 물질을 결합하고 정신과 육체도 포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연은 모든 것이 신의 속성이며 자연의 어떤 것도 신과 독립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을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범신론적 체계속에는 성경이나 기적을 통하여 나타나는 기독교적 계시관념은 있을 수 없으며 신의 보상이나 형벌, 인간의 불멸에 대한 신앙은 있을 수 없다. 그의 이러한 이교적 생각은 계몽주의 시대인 17세기에는 너무나 합리적이었고 18세기 감각에는 너무도 신비적이었다. 후에 스피노자를 열렬히 예찬하는 괴테나 셀리와 같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루터가 신교도로서 신앙개혁을 일으켜 번잡한 성직자의 위계와 제도, 의식을 반대하고 신과의 경험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런 종교개혁의 물결이 한편으로는 교의를 반대하고 경건한 생활을 강조해 나가는 사람들을 양산했다. 신앙이 경험 이라기 보다는 정서적인 것으로 보게되는 경건주의 파가 생겨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자연세계를 신으로 생각하다보니 초월적인 절대자는 생각할 수 없고 자연이 곧 신이 되어 나타난다. 이런 사상에 있어 독일에서는 레싱Lessing, 헤르더Herder가 그 흐름을 주도해 나간다.

자연과 신과의 동일성은 자연의 경건성을 찬미함과 동시에 전통적 기독교의 해체를 의미한다. 속죄, 구원, 저주, 영원한 축복, 하늘, 지옥 등의 종교관념들이 의미를 잃게 되고 하늘의 심판도 무색하게 만든다. 이렇듯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대한 이론의 제기는 자연의 경건성이 싹트나게한다. 괴테와 횔덜린의 종교적 심성에서 그런 감정을 찾아볼 수 있다. 어두운 충동에 의해 이끌리는 파우스
트적 존재가 자연에 대한 경건성을 잘 들어내 준다. 괴테의 자연탐구에서 '하등세계', '인간세계', '이상세계'를 나누듯 그의 문학에서는 이상세계를 존재하는 세계이며 그 세계는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자연다운 세계라는 것이다. 괴테는 어떤 무엇이든 현세에 나타나는 신성한 것에 기도했다. 그는 유태교이든 그리스도이든 이슬람이든 신의 모습에 차이를 두지 아니했다. 따라서 문학에 나타나는 그의 신은 다신론이라 할 것이다. 파우스트가 자기서재에서 불러들이는 지령이든 그가 마지막 순간 하늘로 끌려가는 하늘의 여왕이든 또는 메피스토가 만나는 하나님이든 기독교의 천사들이 신의 좌우에서 보좌하는 경우이든 또는 「동서시집」에 나오는 성스러운 존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판테온이 되어있다. 괴테의 범신론적 자연종교는 한편으로 기독교 세계관의 교조적 유효성이 소멸되어간다는 뜻이고 또 한편 그의 문학을 통한 모든 신앙의 시적 부활이라 할 수 있다. 범신론적 자연에 대한 외경이 최고조에 이르는 것은 횔덜린에게서 이다. 그는 괴테보다 더욱 근본적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친밀감이 더욱 고조되어 종교적 채색을 띠고 있다. 낭만주의가 횔덜린의 시대사적 예감의 결과
로 또는 인간감정의 문제의식의 발로로 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괴테는 그의 작품속에 숨겨두고 조금씩 범신론을 보여준다. 자연의 신성을 자연에 대한 묘사에서 보여 준다. 어두운 고딕서재에서 지령을 단 한번 불러낸다면 횔덜린에게서는 매순간 밝은 대낮에서도 자주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는 그리스 신들의 세계에 자기가 같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의 자연종교인 다신혼(多神魂) 세계가 바로 자기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괴테보다는 횔덜린이 더욱 이교도였다. 그의 상상속에는 어쩌면 그리스의 자연신들만 있을 뿐이다. 그의 친밀한 마돈나인 디오티마가 하늘에서 떠돌다 자신에게로 내려온 것으로 여긴다. 그에게는 재림하는 예수, 지령, 거인, 가니메트 또는 하늘나라의 아버지 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횔덜린의 문제의식은 신들과의 분열이었다. 그가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속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신들과의 화해가 거론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종교다운 면모가 들어 난다. 괴테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외경의 감정이 있지만 횔덜린에게는 하나하나 분열되고는 다시 하나가 되는 그런 모습이다. 횔덜린의 자연에 대한 경건성은 종교적이고 신비적이어서 그가 내세우는 인물들은 (히페리온과 엠페도 클레스) 모두 자연의 품에서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횔덜린이 그가 찾아낸 새로운 세계에서 그가 한사람의 예언자가 된다. 그는 현재의 일컬어 신성을 상실한 밤의 상태로 보고 신에 대한 예배를 올려 인간의 마음에 신이 도래하기를 준비하도록 촉구했다. 괴테의 자연에 대한 예배를 끝없는 존경과 예찬이 횔덜린에게도 넘어간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현상이 모두 신을 계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범신론적 사고가 철학적 사색과 계몽시대의 영향으로 전통적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켜 나갔다.

기독교인들이 자연을 탐구하다가 생각한 것이 이신론(Deismus)이다. 이신론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함과 동시에 이법(理法)을 창조하여 우주에 이 이법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 하나님이 떠나버린 우주를 하나님의 저주나 축북, 협박등에 관계없이 이법에 따라 우주가 운행될 뿐이다. 우주법칙은 기하학적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다. 이런 이법의 질서에 하나님은 없다. 이런 이법적 하늘질서는 그 당시의 종교적 도그마에 반대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법이라 부르고 이 이법을 설명하는 이론을 이신론이라 칭하고 이런 사상이 범신론, 경건주의, 무신론으로 나아가게 되는 출발점이다. 이 모든 것이 계몽주의로 말미암은 인간중심적 사고의 발달이 된 것이다.

4. 기독교에 대한 정서

계몽주의 시대에 제도적 종교에 대해 철학자들이 비판하고 공격한다. 특히 뉴우튼식 사고방식이 세상을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들어 주었다. 계몽사상이 기성종교를 파괴시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교양있는 사람들 또는 교양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관심을 생활중심에서 주변으로 몰아 내었다. 생활외곽으로 밀어낸 그 중요한 요인은 첫째 종교 자체의 세속화였다. 교회사를 비판적인 눈으로 또는 회의적인 태도로 사제나 목사들이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수도승의 일화가 다른 파의 주장을 정반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났다. 합리성의 탐구정신이 불변의 권위와 진리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들의 분쟁은 점점 더 혼란으로 가득해지고 신앙은 서서히 침식당하면서 공멸의 과정으로 진행되어 나갔다. 존 로크(John Locke)도 「기독교의 합리성」이란 책으로 군소종파에게도 더욱 관대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자연의 신비 앞에서 겸허 하라고 역설하고 계시는 곧 이성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로크가 기독교의 진리를 직접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예수가 구세주였다는 주장에까지 다달았다. 이런 논의결과 이제 신의 존재 증거는 신이 이룩한 눈에 보이는 일뿐이라는 이신론자들의 입장과 비슷해진 것이다.

프랑스의 교회는 성직자들간의 불화로 골이 깊어갔다. 교구의 사제가 경건한 가운데 가난하게 생활하지만 태반이 귀족태생인 사교(司敎)들은 궁전에서 우아한 생활을 하고 성직자의 일에는 거의 주의를 쏟지 아니했다.

18세기에는 성서를 둘러싼 성적(聖的)신비를 벗기는 성서분석이나 재해석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이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작업이었다. 이신론(Deismus)을 전개하는 지식인들이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런 활동이 영국에서 발원하여 프랑스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나아가 독일의 일부지역 그리고 아메리카 등지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독일에서 자유로운 신앙으로 나아가는 길이 칸트에게서 완성된다. 사람들의 관심은 더 이상 종교도 아닌 자연도 신도 아닌 인간에게 모인 것이다. 새로운 합리주의가 이전의 종교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칸트의 이성중심의 사고방식, 이성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용기 등이 인류문화 발달사의 측면에서 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레싱이 종교문학에서 종교의 핵심을 형이상학에 두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 정서에 둔 것이다. 하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제쳐두고 오히려 인간완성과 자연의 경건함에 더 비중을 두었다. 범신론적 사고에 의하면 자연과 인간은 동일선상에 있고 모두가 일체감(das All-Einheitsgef hl)을 갖는다. 우주와 인간이 하나이면서 인간이 자연의 피조물이 된다. 그러나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의 사고방식에 따라 인간이 자연의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의 피조물이 된다. 인간이 전체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일부이긴 하지만 참된 자연에 의해 초월적 존재가 된다. 인간은 자연적 존재이면서 합리적인 존재로 자연에 대항해서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윤리가 등장한다.

인간이 윤리적 존재로서 자연과 인간정신(관념) 사이에 갈등이 야기된다. 인간 삶을 더 이상 범신론적 자연감정의 신적 조화에서 보지 않고 자연과 인간사이의 대립적 투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런 사고가 이신론 또는 범신론적 사고에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지만 범신론의 철학적 사고를 더욱 밀고 나간 것이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자연과 불화하는 경우를 우리는 횔덜린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앞에서 보았듯이 비판적인 이신론은 인습적인 기독교를 비판하고 공격했다. 비판 내용은 성직자의 도덕성, 르네상스 이래 보급되어 왔던 기적의 문제 등이었다. 볼테르는 대담무쌍하게 기독교를 공격했다. 성서는 신구약을 싸잡아 지리멸렬한 격언과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며 범죄와 부조리를 온 천하에 밝힌 것으로 그의 「철학사전」에서 공격하고 있다. 이신론자들이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칸트의 철학적 사색 또한 독일 계몽주의의 절정을 이룬다. '계몽주의는 인간 스스로의 굴레에서의 탈출이다. 현명해야 한다. 너는 인간의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등을 무엇보다도 종교의 굴레를 두고 한 말이다. 또한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계몽주의를 종교에 대한 투쟁으로 보고 인간의 합리적 비판과 판단으로 살아갈 것을 고취했다. 18세기의 이신론은 돈독한 신앙심과 흔들리는 신앙심의 중간단계에서 약간 불안정한 사상이었다. 이것을 모두 인간 이성의 회복에 근거한다. 그러다가 급진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신의 존재
자체에 눈길을 돌렸다. 이것이 마침내 흔들리는 신앙이 투쟁의 본 신앙으로 나아간다.  이제 왕국 대신 지상에서의 좋은 인간사회를 만들어 나갈 생각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5. 철학적 견해

서구의 계몽주의는 데카르트의 코기탄스로 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회의 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속일 수가 없다. 데카르트의 생각의 주체로서의 나 즉 "코기탄스"는 중세적 질서로부터 해방을 구가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개인적 의사 표출이다. 이것은 신이 나를 생각해주어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함으로써 내가 존재하게 된다는 근대 시민사회의 시민으로서의 '나'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하는 나"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데카르트는 그런 과학적 이성의 계보를 다시 하나님에게 갖다대고 있다. 이성을 일컬어 하늘의 빛이라고 한다면 인간도 곧 신의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데카르트의 인간이성이 신적 이성을 물러 받았다는 이론이 가능하다. 헤겔의 절대정신 또한 신의 이성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인간의 생명체를 기계로 본 것이다. 이 명제는 정신이 물질보다 더 확실한 것이며 나의 정신이 남의 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이 되고 있다. 대륙의 합리론은 데카르트의 철학정신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주관주의가 되고 영국의 경험론은 이런 주관주의를 부정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물리학의 발달, 생물 화학의 발달은 시민사회의 인식체계를 바꾸어 놓았다. 과학자들이 제시하기 시작한 진리체계는 곧 우주해석의 강력한 방편을 제공한 것이다. 갈릴레오의 지동설은 그 이전의 천동설이 지지하던 우주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고 지구 중심이 바티칸이요 바티칸의 주인이 곧 하나님의 대리자였다. 그러나 지동설이 들어오면서 지구는 태양의 변방으로 밀려나니 지구의 중심인 바티칸이 무엇이며 그 주인 교황청 교황은 무엇이 되겠는가, 교황은 지동설이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코기탄스의 계몽주의 사조는 자아의 실체성을 확인하고 우주인식에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다. 칸트의 인식론에서도 그런 이성의 구성물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가 객관적으로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식능력이 이 우주를 능동적으로 구성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주관인 "나"가 이 우주를 창조한 것이 된다. 이런 칸트의 인식론으로 인해 우리
는 그를 계몽주의의 완성자라 부른다. 우리가 구성한 우주는 우리의 인식체계에 나타난 우주일 뿐이며 그런 우주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그러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주의 사물 물(物)자체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못 박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의 철학을 계몽주의의 극복이라 칭하기로 한다. 칸트의 물(物)자체에 대한 불가지론(agnoticism)은 데카르트의 이성에서 출발한 필연적 귀결이다. 나타난 사물의 현상, 들어난 모습 지각된 양태 등은 있기는 한데 그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으로 해 두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칸트의 종교관을 지나친 이성주의로 치부하여 그를 무신론자로 분류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에서 이룩한 선구자들의 노력의 바탕 위에 독일 문학부분에서는 계몽주의의 시와 희곡을 쏟아낸다. 레싱과 클롭스톡크가 그 주역이다. 레싱은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에서 이신론적 관점에서 기독교 교리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인간
의 종교적 충동은 인간에 내재하고 또 종교를 뒷받침 할 신학 이전부터 그런 충동은 있어왔다고 논했다. 빙켈만, 비이란트,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계몽주의의 사고는 인간의 종교적 질곡에서 해방을 모토로 하고 있다. 세계관, 우주, 미신 종교에 대한 터부가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파괴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계몽주의가 모든 권위로부터 인간의 사색을 자유롭게 했다면 그것은 곧 인간이성의 사용으로 종교에 대한 견해를 새롭게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문학적 과제가 자연모방, 생활의 유익함,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이성과 법칙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지나침은 문제다. 차가운 이성적 논리가 인간 삶을 규정할 수도 없거니와 참된 문학과도 거리가 있다고 보아 이성중심에서 점차 감정위주의 정서문학으로 나아간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다. 클롭스톡크 시대사조의 한가운데서 클롭스톡크의 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 등 감정위주의 서정문학이 인간정열을 불러 일으킨다. 계몽주의 이성판단과 감정의 허구성이 충돌하면서 부자연스러운 흔적을 '질풍노도'로 남긴다. 계몽주의와 질풍노도의 문학운동은 근본적으로 별개의 것이 아닐 것이다.

6. 결론

서구 계몽주의는 물리학, 생물학, 화학, 천문학 등의 발전으로 새로운 우주와 인간을 과거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 사조이다. 과거의 인습에서 사람을 억압하고 미신과 교리 교회의 권위 등으로 억눌린 시민 사회가 개화되어 이제는 더 이상 교회의 착취와 압제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계몽사조가 전통, 규범, 현존의 권위에 대한 전반적 검토를 하여 인간 삶에 재배치를 한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인간이성의 그 족보는 신적 이성에 두고 그의 코기탄스가 헤겔의 절대정신으로 확대되어 나간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우주에다 근대이성을 입힌 근대론적 진보사관이다. 물(物)자체를 불가지론적으로 남겨놓은 놓은 칸트 역시 철저한 하나님의 아들일 뿐이다. 사구 계몽주의가들이 그가 무슨 주장을 했다해도 그들 모두의 본래 모습은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모습을 변장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는 기독교 문화론의 범위를 한발자욱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이신론, 이성의 힘으로 종교적 진리를 확인하려했던 모든 노력, 오로지 이성만이 종교적인 지식을 가져다 준다는 이성지상주의도 결국 기독교 문화론의 범위내에 머문 것이다.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공의 범위에서 사유하고 판단하고 재단했다. 계몽주의는 철저하게 기독교를 비판하고 공격했으나 그 사조는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또 다른 시대의 흐름으로 나아간
것이다.

계몽주의 사조의 태동과 발전 변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 자본주의의 모체가 되어 오늘 까지도 우리 삶을 지배하는 새 시대의 패러다임을 만들어 주었다.

參 考 文 獻
B rner,Peter : Goethe, Rowolt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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